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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ul 02. 2024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의 자기중심적인 사랑

영화 <클로저> ‘댄’을 통해 본 유아기적 사랑

영화 <클로저(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댄(주드 로 扮)은 <500일의 썸머>의 톰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찌질한 병적인 자기애(나르시시즘)를 나타낸다. 그는 내로남불의 전형으로 완전무결한 사랑의 ‘대상’에 집착한다. 자기 자신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만, 자기 애인이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건 순수한 사랑의 훼손이다. 심지어 그 애인과는 자신의 외도 때문에 헤어져 다시는 만날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한 기간에 일어난 일인데도 말이다.


‘정신 차려! 엄마 같은 애인은 세상에 없어. 잘 생각해 봐. 너희 어머니도 네 모든 걸 수용한 완벽한 사람은 아니거든? 때때로 실수하고, 서운하게 하고 야단도 치는 사람이었거든? 이제 그만 환상에서 좀 깨어나지?’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푸는 이상 속 엄마 같은 현실 애인을 꿈꾸는 댄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며 소리치고 픈 직설이다.


<500일의 썸머>에 이어 이번에는 <클로저>의 주인공 네 명의 사랑 방식을 살펴보며 사랑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해보려고 한다.




댄은 신문사에서 부고 기사를 쓰는 기자이다. 길에서 달려오던 택시에 치여 쓰러진 앨리스(나탈리 포트만 扮)를 얼떨결에 병원에 데려다주고 두 사람은 연인관계가 된다. 댄은 뉴욕 출신의 스트립 댄서, 앨리스의 인생을 소재로 글을 써서 마침내 자신의 오랜 염원인 소설가의 꿈을 이룬다. 그리고 책 표지 사진을 찍으려고 만난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 扮)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병적인 자기애 상태에 머물러 있는 댄의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 면모는 영화 내내 드러난다. 안나의 스튜디오에서 댄은 마치 왕이라도 된 듯이 자기는 가만히 서 있으면서 안나에게 ‘이리오라(Come here)’고 요구한다. 자신이 상대가 필요한데도 먼저 다가가기보다 상대를 움직이는 자기중심적인 모습이다. 감정에 취해 충동적으로 서로 키스했지만 안나는 댄에게 동거녀 앨리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애 같이 굴지 말라’며 그를 거절한다. 그러자 댄은 안나인 척 연기하며 음란한 채팅을 해 한 남자를 꼬셔서 안나가 혼자서 자주 시간을 보내는 수족관으로 오도록 유도한다. 안나가 곤란해지도록 복수를 한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답게 누구도 댄을 거절해서는 안 되고, 거절을 받았을 때 못 견디는 성격이 반영된 장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안나는 수족관에 나타난 이 낯선 남자, 래리(클라이브 오웬 扮)와 연인관계가 되고, 나중에는 결혼까지 한다.


자신을 거절한 안나를 향한 댄의 집착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안나의 사진전에서 안나가 ‘1년 만에 만났네요’라고 말을 하자 댄은 ‘계속 봤잖소’라며 자신의 스토킹을 대놓고 인정한다(무슨 자신감으로? 이 또한 모든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 나르시시즘의 특징이다). 심지어 ‘스토킹이 아니라 지켜보는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말도 서슴지 않는다. 만일 안나가 그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줬다면 댄은 스토커처럼 안나에게 집착하고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언어학자인 전 애인 루스를 차버리고 앨리스에게 ‘환승’했듯이 안나에게도 금세 싫증 났을지도 모른다. 애정 대상의 완전무결함이 중요한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상대의 사소한 결점도 견딜 수 없는 치명적인 이별 사유가 된다. 실제로 댄은 안나가 이혼 서류 서명을 받고자 래리의 요구를 수용해 그와 잤다는 사실을 알고는 ‘우리 사랑은 순수함을 잃었다’며 끝내자고 한다. 다시 재회한 앨리스에게도 래리와 잤는지 집착적으로 추궁해서 관계의 파국을 맞이한다.


댄의 모든 말과 행동에는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나르시시스트의 태도가 묻어난다. 일단 처음에 처치를 받고 같이 병원을 나선 앨리스와 길을 걸으며 ‘런던에는 탐험하러 왔다’는 앨리스에게 대뜸 ‘(런던에서) 날 만난 게 행운’이라고 말하고, 안나의 애인 래리의 직업을 듣고는 ‘피부과 의사라니 하품 나오겠다’며 서슴없이 깎아내린다. 안나가 그럼 ‘부고란 기자는?”이라고 묻자 댄은 책이 망했는데도 불구하고 ‘작가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하고, ‘(책 판매가 부진한 것은) 제목 때문’이라며 <아쿠아리움>이라는 제목을 추천한 안나를 탓하기에 이른다. 자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분화하지 않아 허상을 쫓고 자기중심적이며 남 탓하는 댄의 성격을 다시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내용을 유튜브 영상으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글보다 좀 더 풍부한 시각 자료와 나르시시스트 연애의 특성을 정리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




누구에게나 자기애는 있다. 건강한 자기애가 없는 사람은 위축된 삶을 산다. 어떤 비판이 있더라도 내가 옳다고 판단하고 하는 일에 대해 확신을 갖고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건강한 자기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애만으로 온 마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면? 그때는 문제가 생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한다. 자기의 이상적 모습을 타인에게 투사한다. 그저 자신이 투사한 내 안의 이미지인 또 다른 자신을 사랑하고 소유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공감하는 능력, 타인을 배려하는 능력은 부족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 여기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것에 일말의 미안함도 느끼지 않는다. 병적으로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그 안에서 만족을 얻는다. 충족되기 어려운 끝없는 경탄과 숭배, 칭찬의 늪을 만든다.

_하지현, <관계의 재구성(궁리, 2006.10)>, 192~193쪽 중에서


댄은 자신이 먼저 안나에게 끝났다고 선언하고는 ‘안나를 돌려달라’며 래리의 병원을 찾아간다. 댄은 래리와의 신경전에서 ‘섹스할 때 눈을 감는다며? 울면서 엄마를 찾는다지? 마마보이’라는 자신이 감추고 싶은 상처를 들킨 정곡을 찔리고는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경쟁자인 래리 앞에서 아이처럼 눈물범벅이 돼 ‘이제 자신은 어떻게 해야겠냐’며 도리어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묻는 지경이다. 성인 남자 대 남자가 아닌 흡사 인생 경험이 풍부한 아버지에게 답을 구하며 의존하는 불안정하고 미성숙한 아들 같은 대화이다. 애정에 목말라 안나라는 대상으로 표상되는 엄마를 찾으러 갔는데, 강건하고 위협적인 아버지로 표상되는 래리가 자기 아내를 아들로부터 지키고, 아들에게는 대안을 제시하는 모양새이다. 영화 초반, 앨리스와 우연히 시립 묘지를 방문한 댄은 ‘20년 전, 엄마가 돌아가신 날 아빠랑 같이 한번 와 본 적이 있다’라고 털어놓는다. 댄에게 사랑이란 결핍된 엄마의 애정을 갈구하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래리는 댄에게 앨리스가 일하는 스트립 클럽을 알려주고, 애정결핍인 댄의 사랑은 이렇게 또 한번 옮겨간다.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하고 타인의 인정과 찬사가 없으면 견디지 못하며 혼자 지내지 못하는 병적인 자기애가 절정으로 드러난 장면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데 도취돼 있는 나르시시스트는 모순적이게도 사실은 자기애가 부족한 사람이다. 깊은 내면의 열등하고 무기력하고 무가치한 자기를 감추고자 병적으로 과대팽창한 자기를 발달시켜 그 속에 갇혀서 자기만족을 얻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택시에 부딪혀 기절한 앨리스는 눈앞의 낯선 남자 댄에게 ‘안녕, 낯선 사람(Hello, stranger)’라고 인사한다. 안나의 전시회 주제는 <낯선 사람들(Strangers)>이고, 안나에게 계속 거절당한 댄은 ‘내가 당신의 낯선 사람이니 기꺼이 도약하라(I’m your stranger, Jump).’고 한다. 이처럼 영화는 낯선 사람(stranger)이 가까운 사람(closer)이 되었다가,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낯설고 멀어지는 과정을 반복해서 그려낸다. 그런데 한편으로 닫힌 사랑을 하는 네 인물(closer)을 의미하고 있지 않은가 싶다. 제목 클로저처럼 닫힌 사랑을 하기는 앨리스, 안나, 래리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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