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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소향 Oct 24. 2021

배려가 없는 것이 배려.

#2-3. 내가 만난 아이 (정현)

정현(가명)이는 고1 때 처음 수업을 진행했다. 정현이네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정현이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전에 알았더라면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갔을 텐데 그런 사전 정보를 전혀 받지 못한 상태로 방문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학생 앞에서 당황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평소처럼 테스트를 보고 정현이가 푸는 모습과 풀이과정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열심히 풀고는 있었으나, 답은 하나씩 비껴나갔다.


간단한 테스트를 마친 뒤, 어머니와 상담을 진행하였다.

정현이는 태어날 때부터 청각장애를 갖고 태어나 보청기를 달고 살아요. 선생님.
아마 빠르게 말씀하시면 정현이가 잘 알아듣지 못하기에 다른 학생에 비해 조금은 천천히 말씀해주시길 부탁드려요. 아이가 그래도 욕심도 있고, 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어서 시키는 대로는 열심히 할 거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이었다. 과외 인생에 청각장애를 겪고 있는 학생을 수업하는 것 자체가.

두세 번 수업을 진행해보니, 어머니 말씀대로 정현이는 끈기가 있고 오기가 있었다. 시키는 대로 최대한 하려고 노력했고 이해가 잘 안 되면 두 번, 세 번 물어보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한 단원 진도를 수업 1번에 나갈 수 있다면, 정현이는 한 단원 진도를 2번 수업에 나눠 진행해야 했다. 아무래도 말의 빠르기와 이해도 등 복합적으로 고려하며 수업을 진행해야 했기에 내 마음처럼 진도를 빼는 게 쉽지 않았다.


한 번은 정현이가 수업시간이 다되었는데도 집에 오지 않아 어머니께 여쭤보니, 아이가 수업 전에 잠깐 달리러 나갔다고 했다. 여고에 다녔던 정현이는 학교에서 학생들과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면 저렇게 혼자 집 근처를 계속 뛰면서 스트레스를 날리는 편이라고 어머니께서 대신 말씀해주셨다.

아무래도 여고라 학생들의 뒷얘기에 조금은 상처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만 하고,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다. 물어보고도 싶었지만, 수업 나가기도 너무 빠듯했기에 다른 이야기들은 할 여유가 없었다.


정현이는 나와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내내 수업을 진행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서 5년 정도 살다왔기에 어학 쪽은 괜찮게 성적이 나오는 편이었으나, 문제는 수학이었다. 2년을 수업하는 동안, 난 정현이를 배려하지 않았다.

숙제를 다 못한 날은 그 어떤 학생들보다 더 혼을 내었고,

정현이가 지친 날에도 수업은 계속되었다.

숙제량 또한 다른 학생들과 동일하게, 차등 없이 여느 고등학생들 숙제만큼 내주었다.


수학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기에,

정현이에게 분명 버거웠을 것이다.

중학생과는 달리 고등학생들은 내신을 최대한 잘 받아야 나중에 수시를 쓰던, 정시를 가던 유리하다.

정현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다그쳤는지도 모르겠다. 정현이가 잘되면 좋겠어서.


고3이 되자,

수학만 할 수 없기에 수학 비중은 조금 줄이고 타과목에 집중하고 싶다고 하여 수업은 중단되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흐르고 수능이 끝난 어느 날,

정현이에게 연락이 왔다.

수능을 마치고, 선생님이 생각나서 연락을 하였다며 밥 한 끼 먹자고 했다.

난 반가운 마음에 정현이와 약속을 잡고 정현이네 집 근처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헤어질 무렵 정현이는 종이상자를 내게 건넸다.


선생님께 드리고 싶어 샀다며,

그 안엔 고전서 포함 책 2~3권과 정성스럽게 쓴 편지가 들어있었다.


수업이 힘들 때면 가끔 정현이와 책 이야기를 했었다.

선생님도 책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한다며, 사서를 원했던 정현이도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현실적으로 사서는 일자리가 많지 않고, 원하는 만큼의 경제적 자립을 꿈꾸기 쉽지 않을 수 있기에 다양한 꿈을 갖고 공부하라고 조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책 이야기를 기억하고 정현이는 내게 여러 권의 책을 선물한 것이었다.

책 보다 놀라게 한 건, 정현이의 편지였다.

선생님.
그동안 절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께 가장 감사드리는 건, 차별 없이 저를 대해주신 거예요. 사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는데 선생님은 저를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혼내시고 숙제도 그만큼 내주시며 절 독려하신 것 잘 알고 있어요. 비록 선생님이 원하는 만큼 다 쫓아가진 못했지만, 그래도 선생님 덕분에 더 힘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전 절 위한 배려가 싫어요.
저도 다 똑같이 할 수 있는데... 배려를 이유로 그만큼 밖에만 보지 않으니 때론 그게 힘들어요. (중략)

정현이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정현이는 내겐 그저 똑같은 학생이었고, 그 어떤 학생들보다 열심히 하려고 했기에 더 가혹하게 그리고 더 열심히 지도했던 기억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주변에 장애를 가진 지인이 없었기에,

나 또한 어떻게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대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똑같이 행동을 한 건 어쩌면 내가 아무것도 몰랐기에 할 수 있던 행동이 아니였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배려를 하지 않는 배려가 몸이 불편한 친구에게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정현이를 통해 아주 조금은 배울 수 있었다.


정현이를 만나고 난 한 달 뒤, 정현이 어머니께 연락이 왔다.

정현이를 좀 설득해달라는 것이 연락의 이유였다.

정시모집에서 정현이는 본인이 원하는 학과에 맞춰 대학원서를 넣었고, 어머니와 아버님은 정현이 몰래 E대 원서를 넣어 합격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특별전형이 있기에 일반전형보단 조금 더 수월했을 테지만 그래도 정현이는 많은 노력 끝에 좋은 결과를 받아 든 것이었다.

정현이와 이야기를 해보니, 정현이는 단호했다.

E대 학과는 본인이 원한 과가 아니었고, 중요한 건 E대는 여대였기에 정현이가 가기를 너무 꺼려했다.

여고에서 받았던 상처가 아직 정현이에게 남아있는 듯했다.


그런 정현이를 설득할 수 없었고, 오히려 정현이 어머님을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정현이는 똑 부러지는 아이니, 자신의 진로와 공부는 스스로 잘할 거라고.


어디서든 씩씩하게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정현이에게

나도 정현이를 지도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아주 늦었지만 그때 전하지 못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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