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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연 May 08. 2020

내 엄마로 태어나 줘

그다음 생애엔 내가 엄마의 엄마로 태어날게.

나는 엄마의 첫째 딸이다. ‘장녀’라는 무게감을 느끼며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랑비에 옷 젖듯 그 무게감도 그렇게 젖어든 건지, 아니면 애당초 이렇게 태어난 건지 잘 모르겠지만 동생이 명품 옷을 사 입을 때도, 해마다 해외여행을 갈 때도 난 그러지 못했다. 아빠의 병원비와 그로 인해 생긴 빚으로, 첫 직장에서 3년 동안 모은 적금은 물론 지속적인 경제 활동에도 불구하고 내 것은 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도 1년에 천만 원씩 모아 병원비 때문에 생긴 빚을 10년에 걸쳐 모두 갚았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도 내게 바라지 않았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 내생에는 철부지 막내로 태어나고 싶다. 조금은 천방지축이어도 좋겠다.   


  



엄마는 평등하지 않았다

한 달 전, 동생이 여행 간 사이 엄마와 단 둘이 3박 4일을 지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불쑥 오래전 일을 말씀하셨다.  “넌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빈손으로 들어오는 법이 없었어. 엄마 속옷 한 장이라도 사들고 들어왔지. 그리고 그때 참 좋았어. 엄마한테 건강검진받게 해 줬던 거. 고맙고 많이 자랑스러웠어.” 잊고 있었다. 내가....... 그랬었다. 서른 즈음 해마다 내 생일이면 엄마께 선물을 드렸다. 강남의 모 병원에서 종합 건강검진을 받으실 수 있도록 예약을 했고 “엄마! 내 생일 선물이야~” 하고는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갔었다. 내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된 건 대학 선배 언니 덕분이다. 


선배 언니는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보니, 엄마에 대한 고마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고 했다. 하지만 난 서른이 되도록 결혼할 생각도 없이 지냈기에,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더 느낄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싶었다. 엄마의 딸로 태어나게 해 주신 감사함을 담아 ‘내 생일 선물’을 엄마께 드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국가에서 대신해 주는 건강검진으로 대체하고 있지만, 국가에서 책임져 주기 전까지는 해마다 내 생일은 ‘엄마의 종합 건강검진 날’이 되었다. 


엄마가 기억하시는 것처럼 엄마를 잘 챙긴 것 같은데 엄만 늘 동생 편에 계셨다. 친구 말에 따르면 ‘나 닮은 자식’한테 더 정이 간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엄마의 외모를 쏙 빼닮은 동생은 엄마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자랐다. “열 손가락 깨물어 봐라. 안 아픈 손가락 있나” 가끔씩 엄마께 내 속내를 드러내면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느꼈다.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덜 아픈 손가락이 있다’는 것을.......     


초등학교 때 일이다. 일주일 용돈으로 500원을 받았다. 필요할 때마다 받다가 또래 친구들이 ‘용돈’을 받자 나도 목돈(?)을 용돈으로 받고 싶었다. 나의 생각을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매일 100원씩 받을 건지 일주일에 500원을 받을 건지 선택하라고 하셨다. 난 목돈을 받고 싶었기에 일주일에 한 번, 500원을 받기로 결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일주일에 700원이 아닌, 왜 500원이었는지 궁금하지만 몰아서 주는 대신 짜임새 있게 쓰길 원하셨던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분명히 여쭤봤겠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없다. 


처음으로 용돈이라는 것을 받게 된 게 정확히 몇 학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은 넘었던 것으로 짐작하는데, 금액의 크고 적음보다는 두 살 터울의 동생과 나의 용돈이 같았다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지금은 ‘겨우 500원?’ 할 수 있지만 금액의 크고 적음에 대한 불만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던 듯하다. 다만 2살이나 차이 나는 동생과 같은 금액으로 받는다는 것이 불만스러워 "왜 동생과 용돈이 같으냐."며 이의 제기를 했고, 엄마는 ‘평등’이라는 단어를 무기로 삼으셨다. 


그땐 ‘우리 엄마는 평등하신 분이다’라는 생각이 더 컸던 듯, 엄마의 처사가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때만 해도 남아 선호 사상이 강했던 시기라 그랬는지 ‘평등’이라는 단어의 등장으로 나의 불만스러운 기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늘 동생의 편에 계신 엄마의 모습에서 동생에 대한 사랑이 더 크다고 느낀 나는 어릴 적 기억이 소환되곤 한다. ‘일주일 용돈 500원’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그때의 일을 말씀드리며 ‘평등’이라는 단어 대신 ‘불평등’이라는 단어를 꺼내 엄마의 생각이, 행동이 ‘잘못이었음’을 말씀드렸다.     



“난 내생에 태어나면 꼭 막내로 태어날 거야.”
“.......”
“엄마는 뭐로 태어나면 좋을까?”
엄마의 갑작스러운 물음이 다소 놀랍긴 했지만 멈춤 없이 대답했다.
“내 엄마로 태어나야지.”
"정말? 그래도 돼?"




엄마의 눈 주위는 이미 빨개졌다. 나까지 눈물을 보이면 눈물바다가 되고 말 테니 코끝이 찡해지며 터지기 직전인 눈물을 감추고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응, 내 엄마로 태어나. 그리고, 그래! 나만 낳아. 나만 낳아서 차별하지 말아 줘. 엄마는 충분히 좋은 엄마지만 난 천방지축 철도 좀 늦게 들고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 이번 생은 나도 이렇게 태어나 어쩔 수 없으니 다음 생은 엄마의 외동딸로 태어나 그렇게 살게 해 줘. 그리고 그다음 생애엔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나.”     


엄마는 충분히 좋은 엄마였고 여전히 좋은 엄마다. 존경받아 마땅한 삶을 살아오셨다. 하지만 사랑을 줘야 하는 자식이 둘이라는 이유로 난 엄마께 투정을 부린 것이다. 기적이라는 게 있어서 엄마가 건강을 되찾으시면 참 좋겠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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