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2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이었다. 헌책방 나들이가 취미인 나는 친구와 함께 배다리 헌책방거리로 이동했다. 피서철이라 그랬나....... 다니던 헌책방은 ‘8월 2일까지 쉽니다’라는 팻말과 함께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친구를 이대로 보내기가 아쉬워 처음으로 배다리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낡고 빛바랜 서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노란색의 외벽에 이름만 가지런히 있는 이곳이 10년 전엔 어마 무시하게 큰 간판이 걸려 있던 한미서점!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설렘을 기억하며 그곳으로 들어가 본다.
작지 않은 그곳은 많이 낡아 생소함조차 낯설게 느껴졌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난 이미 한미서점으로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빛바랜 서점 안에는 책꽂이뿐만이 아니라 바닥에도 책들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친절함이 배어있는 ‘그남자’는 과하지 않은 말과 행동으로 물음에 답해주었고, 어쩐지 그 모습이 자꾸만 생각 나 값이 정해지지 않았던 책을 보기 위해 이틀 후 다시 방문했다. 인사를 하고 들어가 책을 고르고 책값을 지불하는데 시원한 캔 녹차 하나를 내민다. 콩닥콩닥.
한 번은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어 배다리 일대를 크게 돌아본 후 들어가기도 하고 그렇게 들어가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나오기도 하였다. 이름도 모른 채 연애는 시작되었고 질문이라는 문을 지나지 않은 채 궁금함이 점점 많아지는 만남이 이어지던 어느 날, 그남자로 부터 온 휴대폰 문자가 내 마음속에 깊이 들어왔다.
‘이름을 묻거나 알리지 않은 이유는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 각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 이름은 ㅇㅇㅇ입니다.’ 이름도 모른 채 그남자를 찾아갔던 것은, 그 모습 그대로를 보기 위함이었던 나와 닮았음을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쿵쾅쿵쾅!' 사람의 심장이 그렇게 뛸 수 있다는 것에 놀랐던 그해 여름은, 내 생에 가장 아름다웠던 여름이라 말할 수 있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서점 주인이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남자가 늘 그곳에 있다는 이유로 거의 출근하다시피 찾아갔다. 그곳에서 책도 보고 차도 마시면서 우린 만남을 즐겼다. 그리고 다음 해 6월의 첫날 헌책방의 안주인이 되었다.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나뉘어 살다가 우연처럼 만나 우린 하나였구나....... 깨닫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른을 훌쩍 넘겨 결혼하는 나를 보며 친구는 말했다. “약아빠진 세상에서 약지 못해 헌책방 하는 사람을 만났구나. 하지만 너를 보니 인연은 있는 것 같다”
고 했다. 남녀의 만남에 있어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다시 생각해도 찬란하고 눈부신 순간이었다.
드라마 도깨비로 알려진 한미서점은 현재 2대째 운영하고 있는 배다리 최초의 헌책방으로 1세대이신 시아버님이 열 일곱살때 시작하셨다. 1953년 한국전쟁 후,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당신이 갖고 있던 책을 판매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역사가 오래된 헌책방
헌책방은 생각보다 고된 일이 많았다. 손님에게 매입한 책들은 그대로 판매할 수 없는것들도 많아 책꽂이에 꽂히는 것과 함께 바닥에 자꾸만 쌓여갔다. 서점 벌이로는 직원을 둘 형편이 안되었고 나 또한 바쁘다는 이유로 서점 일에는 관여치 않았다. 해가 갈수록 책을 담는 그릇인 서점은 점점 노후되어 갔고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어져 대책이 필요했다.
많은 고민 끝에 ‘책도 파는 헌책방’으로 변모를 꾀하며 서점의 1/3 공간을 책 대신 문화프로그램 공간으로 바꾸기를 감행했다. 천천히....... 천천히....... 지루하고 고된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남자는 묵묵히 해냈다. 낡은 천정을 털어내니 건물의 이력이 보이는 천정이 드러났다. 그 건물을 살리고 싶어 기둥을 세우고 틀어진 건물을 보강했다. 4m가 넘는 책꽂이를 만들어놓은 문화프로그램 공간은 ‘허상 공상 상상을 실현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허공상실'이라고 지었다. 헌책방과 나란히 운영되는 허공상실에서는 책을 매개로 한 소소한 동네 클래스를 열기도 하고, 낡은 책을 수리하기도 하며, 책을 읽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안을 가꾸고 밖을 내다봤다. 흰색을 기억하는 시멘트 외벽은 곳곳에 각질처럼 일어난 페인트의 잔재를 벗어내려 했다. 어떤 색이 좋을까? 머릿속에서 수많은 색으로 칠하고 지우기를 반복 한끝에 트렌드 컬러인 짙은 회색으로 결정하고 서점 건너편에서 주변의 건물을, 그리고 동네를 바라봤다. 짙은 회색이라니....... 가뜩이나 어두운 배다리가 더 칙칙하게 보이겠다 싶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눈을 지그시 감고 옆 건물과의 어울림을 들여다보는데 세월호의 아이들이 생각났다.
"노란색! 노란색이야!!!"
2015년 11월, 우린 서점의 외벽을 노란색으로 칠했다. 그렇게 노랑노랑 한미서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가 찾아왔다. 1953년부터 시작된 한미서점이 가려져 있다가 검색어 1위까지 하게 되었으니 도깨비의 위력은 가히 놀랄 만했다. 어느 날 도깨비가 책 손님으로 다시 온다면? 도깨비와의 첫 만남이 생각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