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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24. 2021

흔들리지 않는 어깨는 없다

육아와 함께 찾아온 슬럼프

우리는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 원고가 서랍 안에 쌓이고, 우리가 다른 것들을 쓰다 그 쌓인 원고들을 잊어버리게 될 때조차.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문맹>, 백수린 옮김, 97p


헝가리 출신 소설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산문에 나오는 글귀다. 그녀는 고국에서 스위스로 망명하여 모국어인 헝가리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스위스로 망명하던 때 그녀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으며, 어린 딸과 함께였다. 낯선 곳에서 그녀는 아이를 돌보고 생계를 위해 시계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러면서도 글쓰기에 대한 집념을 잃지 않고 프랑스어를 배워 소설을 써냈다.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쓰여서 인지 그녀의 글은 다소 건조하게 느껴지는 문체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 간결한 문체로 빚어내는 이야기는 놀랍고도 흥미로우며 사람을 빨아들이는 무언가가 있다.


그녀의 산문집 <문맹>을 읽으며 나는 잊고 있던 꿈을 꺼내 들었다.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 글을 쓰고 그 글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목소리를 들려주고 듣고 싶다는 것. 부끄럽게도 나의 꿈은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미루고 접어두고 있었다. 글 이전에 내게 중요한 것은 생계와 독립된 삶이었다.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간절하지 않았든지, 삶이 너무 팍팍했든지 이 둘을 병행하는 것이 내겐 쉽지 않았다. 그래서 미루고 접어두었다. 다시 꺼내 든 것은 사회생활도 경제적으로 계속해서 불안하고 흔들리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를 돌아볼 틈이 생겼을 무렵이었다. 비로소 읽고 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했다.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다. 나의 첫 혼란은 이 지점에 있었다. 내가 출산과 육아라는 새로운 과업을 맡으며 사회생활과 글쓰기를 병행할 수 있을까? 그렇다. 나는 어떤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겨우겨우 지키고 이뤄온 것과 새로 도전하는 것들 이 모든 것을 잡고 싶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글을 읽으며 나는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혼자가 아니기에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스스로를 격려했다.




육아는 현실이다. 기본적으로 시간이라는 자원을 쏟아부어야만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조리원을 나서서 온과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모든 생활 패턴과 육체적 정신적 자원의 분배는 달라졌다. 아이가 태어나 100일 정도까지는 밤낮의 구분이 없다. 몇 시간 간격으로 깨어나 조금씩 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해야 하고 배변활동도 해야 한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잠이란 것은 신기해서 같은 시간을 자더라도 중간에 깨어 활동을 하게 되면 제대로 자지 못한 것처럼 멍한 상태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은 멈출 수가 없다. 잘못하면 나 스스로를 돌볼 시간 없이 끌려가게 된다.


나의 이야기다. 게다가 당연하게도 신생아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경험적인 지식이 없었고 그렇기에 글로 습득한 지식에 매달렸다. 책 속의 육아와 돌봄은 나름의 패턴을 갖고 돌아가는 사이클을 갖추고 있는데, 실제 나의 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떤 것을 먼저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돌려보면서 몸을 움직였지만 패턴은 잡히지 않았고 몸과 마음은 점점 힘들어졌다. 게다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온에게 제대로 보살핌을 주고 있는 것인지 확인한 길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정답이 없는 문제에 정답을 찾고 나 자신을 맞추기 위해 힘들어하고 있었다.


독박 육아도 아니고 남편과 어머님의 도움을 받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나는 온을 쉽게 떼어 놓지 못했다. 잠시 떨어져 쉬고 있는 상황에서도 마음은 온통 온에게 가 있었다.


반면, 무언가 써야 한다는 압박감과 쓰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정제된 글이라기보다 토해내듯 써 내려간 일기가 대부분이다. 그때 쓴 일기들을 다시 손에 쥐고 읽어 내려가노라니 이렇게 세세하게 쓸 정신이 어디 있었나 싶을 정도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와중에도 무언가 절박하게 적고 또 적었던 내 모습이다. 육아와 글쓰기 모두에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 것,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조금이라도 틈이 생겼을 때 읽고 쓰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때 심윤경 작가의 소설 두 편을 읽었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과 <설이>라는 장편소설이다. 조리원에서 전자책으로 우연히 접한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화자의 목소리에 빠져 읽어 내려갔다. 마지막 예기치 못한 전개와 마무리는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새로 발표된 <설이>라는 소설은 종이책으로 구입해 읽었다. 마침 도서관에 작가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렇다, 그때는 코로나19가 한국에 퍼지기 바로 직전이었다.


<설이>는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한 생명을 성장시키는 수많은 어른들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아이의 이야기였다. 어른들의 모순에 대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나는 이 달콤한 무심함을 시현에게 한 숟갈만 떠먹여 주고 싶었다.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 최고의 가정에서 자란 시현이 단 하나 가지지 못한 바로 그것, 허술하고 허점투성이인 부모 밑에서 누리는 내 마음대로의 씩씩한 삶 말이다.

심윤경, <설이>, 244p


나는 온에게 내가 생각하는 방식의 완벽한 부모가 되려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정착 온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모른 채. 갓 태어난 온에게 필요한 것은 세심한 보살핌이었을 테지만, 내 스스로 만든 틀에 갇혀 내가 힘들어하면 결국 가장 필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는 걸 저 장면을 읽으며 조금 이해했다. 조금 부족할지라도, 허술하고 허점투성이일지라도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아이와 부모가 함께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눈 내리던 겨울날, 도서관에서 작가님을 만났다.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였지만, 택시를 잡아타고 어떻게든 도서관에 갔다. 내겐 무엇보다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절실히 필요하던 때였다. 담담하고도 따뜻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시는 모습에 한 번 더 반하고, 양육자로서 내 꿈을 가진 한 명의 인간으로서 많은 용기를 얻었다.


그날 받은 싸인엔, 책 속 구절 중 하나인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흔들리지 않는 어깨는 없다.


곽은태 선생님의 반석 같은 어깨 위에서 엉덩이춤을 추며 자랐을 시현을 한없이 부러워한 시간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 두드리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부모의 어깨 위도 알고 보니 멀미 나게 흔들리는 곳이었다.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어깨는 없다. 그렇게 당연한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같은 책, 270p


나의 어깨는 오늘도 흔들리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이뤄내고 싶은 꿈, 동시에 지켜내고 싶은 것들 사이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말과 같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나의 어깨는 흔들리고 있다. 그 흔들림과 나의 빈 틈 속에서 온이 자신의 리듬과 자리를 찾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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