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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24. 2021

함께 만들어 가야 할 사랑

코로나 블루와 함께 찾아온 산후 우울 극복기

온과 떨어져 있는 것이 불안하고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한 걸음 빠져나온 건 출산휴직이 끝나고 복직을 하고 나서였다. 내 세계를 조금씩 되찾으니 온을 불안이 걷힌 사랑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모두 출산 후 몸조리를 도와주시던 어머님이 온을 맡아주마 큰 결심을 해 주신 덕분이었다. 온을 맡기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자 비로소 나를 돌보고 온에게도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10년 전 조카를 돌봤던 때를 생각하시고 봐주마 하셨지만 모든 상황은 그때와 다르게 돌아갔다. 10년의 세월 동안 체력과 근력 역시 많이 약해지셨고, 대구와 우리 집을 일주일에 한 번씩 왔다 갔다 하시며 살림을 보셔야 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고 지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복직 후 1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코로나가 터졌다.


코로나19로 이한 팬데믹 상황은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었고 지금도 계속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중이다. 생활의 많은 부분에 새로운 제약이 생겼고 불안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으며, 사회의 약한 고리가 가장 먼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도 각자의 자리에서 모두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코로나19가 퍼지고 가장 먼저 대구의 신천지 교회에서 집단 감염이 사회의 불안을 초래했다. 그 뉴스를 보면서 남편과 나는 주말 동안 대구에 내려가신 어머니를 걱정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으셨지만 그때는 “대구”라는 말만 들어도 사람들이 불안해하던 때였다. 어머님이 급하게 병원에 가실 일이 생겼는데, 대구 방문 이력이 있다고 하니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는 일이 생겼다. 다행히 심각한 상황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그 낯설고 당황스러운 거부 반응에 어머니는 적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받으셨다.

“대구 사람인 게 죄인이가… 대구 사람들 불쌍하다…”

 

어느덧 코로나19가 지속된 지 2년이 가까워졌다. 백신 접종률이 70%에 가까워지며 위드 코로나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곳곳에 불안과 혼란이 들불처럼 퍼지던 때였다. 지금이라면 침착하게 대응하고 절차에 따라 진행됐을 일도, 그때는 불안에 휩싸인 무질서 속에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고통받고 상처 받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출산 후 언제까지 느끼는 우울을 산후 우울이라고 해야 할까? 내 경우엔, 출산 후 한동안 몸과 마음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육아를 이어갔고, 복직하고 나서 적응하는 기간을 갖기도 전에 코로나가 찾아와 모든 좋지 않은 상황이 겹친 상태였다. 나는 내가 우울하다는 것을 인정했고 내 스스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도 인정했다. 회사 상담 시스템에 문을 두드려 상담을 받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하고 복직한 지인과 대화를 하며 상태를 공유하며 긴장과 불안을 잠시 내려놓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 점점 안 좋아진다는 인식이 내 목을 조여왔다.


우울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모든 것을 예민하게 바라보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 보지 못하고 지나치던 사회의 약한 고리들이 더 잘 보이게 되었고 그들의 고통을 내 몫의 고통 위에 내 것인 양 짊어졌다. 문제는 이게 무기력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삶의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썼던 일기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다. 청소를 하는 행위조차도 의미 없이 여겨진다. 어차피 세상에서 먼지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쪽에서 다른 쪽으로 옮겨질 뿐.


그때 나는 작은 행동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애썼고 그럴수록 의미의 부재도 되돌아오곤 하는 악순환을 겪고 있었다.


감정적으로 무기력만 느꼈던 것은 아니다. 동시에 사회의 약한 고리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돌봄의 문제,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 기후 위기와 환경의 문제, 인간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공동체 생활. 이 모든 것이 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직접적인 문제들이었다.




코로나19로 전면 재택근무가 시작되었다. 나와 남편, 어머니와 온. 우리 모두 24시간을 한 집에서 일하고 생활해야 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것은, 솔직하게 말하겠다. 한마디로 죄책감이었다. 방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당연하게 일을 하면서 먹고 자고 씻어야 했고. 그중에서 먹는 것은 누가 챙겨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방에서 한걸음만 나가면 온을 돌보고 식사까지 챙기느라 몸과 마음을 고단하게 움직이시는 가족이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내가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들이 실은 누군가의 헌신으로, 보이지 않는 그림자 노동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내가 자리에 앉아하는 일과 방 밖에서 나의 가족이 나를 위해 하는 가사노동이라는 이름의 일이 비로소 한 레이어에 겹쳐져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무지의 비늘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그 한심하고도 부끄러운 비늘이 벗겨지자 내가 회사에서 하는 노동과 가사 노동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따져보기에 이르렀다. 당장 눈앞의 한 끼 식사를 위해 필요한 건 너무도 당연하고 구체적인 요리를 하는 일, 그 자체였다. 그것 없이는 내가 에너지를 보충하고 일터로 돌아가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한 공간 안에 이루어지는 순간,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어쩔 수 없다. 그때 우선 느낀 것은 죄책감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다.


우연히 유튜브 씨리얼이란 채널에서 <근데 왜 집 안의 노동만 무급이 됐을까>란 영상을 보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노동의 대가인 임금 안에는 노동력뿐만 아니라 노동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 그러니까 가사 노동이라 통칭되는 일들의 임금이 실은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돌봄이란 이슈는 매우 구체적이고 생활에서 바로 체감할 수 있는 이슈였다. 그때 나의 돌봄 노동을 대신해줄 가족이 없었다면 나 혹은 배우자는 경제 활동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나의 노동을 가족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며 일을 했다.


결국 어머니의 건강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육아휴직을 선택했다. 하루아침에 혼자 감당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남편도 두 달간 함께 육아휴직을 사용했다. 막연히 알고만 있던 어떤 제도를 직접 사용해 보면 현실적으로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할 때가 있다. 한 아이를 돌보기 위해 부모가 모두 동시에 휴직을 하면, 육아 휴직 급여 혜택의 일부를 포기해야 한다. 제도의 내용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왜 그래야 하는지 합당한 설명이 없었다. 우리는 그 혜택을 포기하고 동시 휴직을 선택했다. 이 어이없는 상황이 여기저기에서 발생한 덕분인지 지금은 그런 조항이 없어졌다. 그렇다. 우리는 제도를 사용해야만 그 제도가 갖고 있는 불합리한 점과 모순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그래야 제도가 더 나은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


온을 보육기관에 맡길 수 있을 때까지 7개월가량 휴직을 했다. 사내 어린이집이라는 혜택이 있었기에 그나마 복직을 할 수 있었다. 최근 나는 육아휴직급여 사후 지급금이란 것을 받았다. 육아휴직을 하게 되면 통상임금의 80%, 월 상한액 150만 원, 하한액 70만 원 선에서 받을 수 있다. 그것도 3개월까지만 80%이고, 4개월부터 12개월 동안은 통상임금의 50%, 70~120만 원 사이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휴직 기간 동안 다 받는 것이 아니라, 75%만 받을 수 있다. 나머지 25%는 복직 후 6개월 뒤에 사후 지급금 신청을 해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사후 지급금 미수령 비율이 36%라는 기사를 보았다. 사후 지급금은 복직 후 6개월이 지난 시점에 회사를 다니고 있어야 해당 사업장의 확인을 하고 지급하는데 사실상 복직 후 6개월 이내에 10명 중 4명 가까이 퇴사를 한다는 말이다. 제도가 현실의 허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복직을 하고도 이전처럼 경제 활동을 지속할 수 없는 이유, 거기엔 분명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들여다봐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식사를 집에서 거의 해결하게 되고, 식재료 구매는 온라인 배송을 하게 되는 경우가 늘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생산하고 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마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려대고 버릴 때마다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때면 숨이 막혔다. 내가 생명 활동을 유지하는 것과 연관된 행위들이 지구라는 한정된 자원을 자연 복구하기 힘들만한 빠른 속도로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온을 바라보노라면, 온이 살아갈 세상이 내가 겪었던 것과 너무도 다른 환경일 것이라는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 나를 힘들게 했다.


기후위기와 환경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비정상회담>이란 프로그램 출연자로 익숙한 타일러 라쉬가 쓴 <두 번째 지구는 없다>는 책을 읽었다. 코로나19는 결국 기후위기를 초래한 인간에 의해 촉발된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인수공통감염병이 발병하고 확산하는 배후에는 기후위기가 있다. 기후위기로 인해 야생동물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바이러스나 균을 가진 동물과 인간의 접촉이 늘어난다. 또 바이러스나 균을 옮기는 모기와 진드기의 서식지가 이동하면서 연관된 전염병이 확산하기도 한다. 기후위기로 인한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환경을 너무 짧게 생각하고 좁게 보고 있다는 신호이다.
타일러 라쉬, <두 번째 지구는 없다>, 160p


지구 온난화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미세먼지가 먼지가 아닌 유해 물질인 것처럼,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은 체온이 어느 이상 올라가면 생명이 위험해지는 것처럼 지구에 더 이상 우리 같은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환경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코로나19는 하나의 경고에 불과하다. 한없는 무기력과 자기혐오에 빠져들었을 때, 이 책을 읽으며 그래도 작은 일이라도 하자는 생각을 하며 버텼다.


내가 시작한 작은 일 중 몇 개는 이렇다.

사내 카페에서 음료를 마실 때는 컵을 사용한다. 텀블러가 아닌 컵인 이유는 어차피 들고 이동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텀블러보다 컵이 훨씬 씻고 관리하기 편하다.

액체세제 대신, 샴푸바, 설거지바를 사용한다. 액체세제보다 정화하는 비용이 적게 든다고 한다.

손수건을 갖고 다닌다. 페이퍼 타월 대신 손수건을 사용한다.

가능한 포장이 적게 되어 있는 물건을 선택한다.

정말 작은 일이다. 하지만 무언가 하고 있다는 것, 그게 중요하다.


나는 비로소 그동안 안락하게 숨어 있던 작은 상자를 벗어나 그 상자를 둘러싸고 있는 지구라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넓은 바깥 상자인 지구가 온의 세대를 넘어 그다음에 오는 세대에까지 좀 더 온전하게, 최소한의 회복력이라도 갖출 수 있는 수준으로 지켜질 수 있기를 나는 오늘도 간절히 바라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 사이의 교류가 급격하게 줄었다. 그렇지 않아도 육아로 집안에서 생활하는 비중이 늘어났는데, 당연하게 생각했던 가족모임 조차도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혼자서도 잘 노는 집순이였지만, 내 의지가 아닌 다른 어떤 상황 때문에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것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타인은 지옥일 수도 있지만 내가 아닌 다른 존재들이 나를 나로서 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용기를 내어 연락하고 어럽게 시간을 낸 친구들과의 만남도 기약 없이 미뤄졌다. 나는 비로소 내가 그들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얼마나 그들의 안부를 진심으로 염려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의 고립감은 다른 이들의 고립감에도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코로나19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는 건 어른만이 아니었다. 어린이들 역시 등교를 하지 못하고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무렵 학교라는 세계가 얼마나 크고 다양한 의미였는지 나의 유년시절을 돌아보며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어린이 대상으로 독서교실을 운영하며, 누구보다도 어린이를 깊이 들여다보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존중하는 것이 느껴지는 김소영 저자의 <어린이라는 세계>는 잊고 있던 내 안의 어린이 감각을 되살아나게 했다. 나는 내가 어른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크게 낙담하고 상처 받는 어린이였다. 반면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어른들에게 그들과 동등하게 존중받고 어린이로서 배려받고 있다고 느껴지는 상황은 깊이 기억에 남는다.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으로 기억하니 아마도 대여섯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엄마에게 “자갈치”를 사 오라는 심부름을 받았다. 나는 단숨에 그게 생선이라고 생각했다. 멸치, 꽁치, 갈치 등의 생선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내가 생선이라는 중요한 식재료를 사 오라는 미션을 받았음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동네 슈퍼에 가서 자갈치를 달라고 당당하게 말했는데, 아주머니께서 대뜸 과자 한 봉지를 주셨다. 나는 이거 말고 자갈치를 달라고 여러 번 요구했다. 결국 집에 돌아와서 나는 그 과자 이름이 자갈치라는 걸 엄마에게 듣고 풀이 죽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 하나는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의 일이다. 지금과 다르게 나는 손목시계를 빼놓지 않고 차고 다녔다. 시간이라는 개념도, 언제든지 그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을 지니고 다닌다는 것이 좋았다. 가죽 끈이 닿아 헤질 정도로 차고 다녔는데, 어느 날은 시곗바늘이 움직이지 않았다. 학교 앞 금은방에 가서 시계 약을 교체하기로 마음먹었다. 금은방의 이름은 “수진당”이었다. 문방구나 슈퍼가 아닌 금은방에 들어가 시계 약을 혼자 교체한다는 것이 내게는 매우 큰 일로 여겨졌다. 최대한 자연스럽고 정중하게 손목시계를 내밀며 약을 교체해 달라고 말했다. 두꺼운 안경을 낀 주인장 할아버지는 말없이 시계를 받아 드시더니, 매우 신중하고도 민첩하게 시계의 뒤판을 열고 약을 교체해 주셨다. 그 시간이 매우 신성하게 느껴지던 것이 기억난다. 시계 약을 갈고도 유심히 내 시계를 앞 뒤로 살펴보셨다. 잠시 뒤 한쪽에 있는 유리 케이스를 당겨 여시곤 원래 것과 비슷한 색의 시곗줄을 보여주시며 시곗줄을 교체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다시 말없이 그러나 재빠르게 시계줄을 풀고 새 시계줄로 교체해 주셨다.


수진당의 유리문을 밀고 나가며 나는 무언가 인생에서 큰 일을 해낸 것처럼 느껴졌다. 나 혼자 어른과 대화하고 그 어른이 내게 보여준 조용한 배려와 존중은 나를 한껏 고양시켰다. 내가 이렇게 자세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도 이 일을 잊고 싶지 않아 일기장에 자세히 적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그 일기를 보고 그 뿌듯한 경험에 대해 댓글을 남겨주신 것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어린이는 이토록 작은 배려와 존중에도 크게 성장하고 배울 수 있다. 물론 답답하고 때로는 분하게 느껴지는 일도 분명 있었다. 다행히도 좋은 경험을 더 오래 기억하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어린이라는 세계>에도 이런 어린이의 품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이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고 품위를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


책에는 어린이와 대화하는 가장 어른다운 방법도 나온다.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써 보면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어른스럽게 들리는지 알게 된다. 의외로 반말을 쓸 때보다 대화의 분위기도 훨씬 부드러워진다. 어린이를 존중한다는 의지가 명확히 표현되는 순간, 어른의 여유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진짜 권위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서로 존댓말을 쓰는 사회적인 대화를 어린이도 사양하지 않는다. 존댓말을 들은 어린이는 살짝 긴장하면서도 더욱 예의 바르게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마치 그런 대화가 몸에 밴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다. 어떤 어린이는 내 인사에 야구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네, 안녕하세요”라고 답하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저절로 얼굴이 분홍색이 되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럴 때 조심해야 한다. 절대로 귀여워하는 표정을 지으면 안 된다. 매번 대단한 자제력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른이니까.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193p


나는 현(남편)과도 온(아이)과도 존댓말과 반말을 자연스레 오가며 대화를 한다. 현과는 원래 존댓말을 쓰던 관계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도 했고 어느덧 그런 대화 방식이 우리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눈치채고 모드를 바꾸게 하는 신호가 되기도 했다. 존댓말을 쓴다고 다투지 않는 건 아니지만(존댓말로 얼마나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후벼 팔 수 있는지 나조차 깜짝 놀랄 정도다) 대화를 적절하게 끊고 이어가는 매개가 되곤 한다. 온에게도 자연스럽게 섞어 쓰게 되었는데, 말을 배우기 시작한 온도 내게 고맙습니다와 고마워를 그때그때 사용한다. 온과 현도 그렇다. 그게 우리 사이의 대화법이다. 깊이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과 이렇게 대화하고 싶기도 하다.




나는 이런 책들을 읽고 이런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며 코로나 블루와 산후 우울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수없이 많은 목소리들이 나를 살렸다.


마지막으로 내가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찾았던 또 다른 목소리를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정혜윤 저자의 <앞으로 올 사랑: 디스토피아 시대의 열 가지 사랑 이야기>란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문장들이 어두운 시기를 지나가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직시하게 하고 한편으로 할 수 있다는 응원을 건네는 말들이다. 그중에서 한 구절만 정말 어렵게 어렵게 골라내어 소개한다. 마음에 울림이 느껴졌다면 전체 책을 읽어보길 진심으로 권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은 함께 다시 태어나야 한다. 서로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행복한 사랑은 거기서 태어난다. 사랑은 삶의 재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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