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도 절망도 없이

함께 버티는 것

by 나날

코로나 19는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2주로 예정되어 있었던 재택근무는 곧 5주째에 접어든다. 언제쯤 끝이 날지, 지나간 자리엔 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이 알 수 없음 때문에 불안하고 또 불안하다. 우울증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또 다른 외부 상황을 맞닥뜨리니 세상을 보는 렌즈가 한층 더 어둡고 희뿌옇게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4주간의 재택근무

지금 내가 진행하고 있는 일은 예전에 담당했던 포지션에 비해 협업이 많지 않다. 오히려 집중해서 아웃풋을 최대한 많이 내야 한다. 코로나 19로 재택근무를 하기 직전에 나는 스트레스와 부담감, 해내지 못할 것 같은 압박감으로 터지기 직전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 스스로가 내 목을 조르고 있었기에 원망할 것도 없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재택근무를 하면 좀 더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지 않을까?'


쥐어짜면 겨우 몇 방울 나오는 아웃풋 대신, 조금이라도 숨 쉬고 거리를 둘 수 있게 도와줄 신선한 인풋이 필요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안에서부터 찐득하게 곪아, 차마 남에게 보일 수 없는 치부가 밖으로 스멀스멀 기어 나올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나 자신의 한계와 마주하니 그동안 살면서 나도 모르게 키워왔던 어두운 내면과 불편한 기억들이 내가 어찌 손을 쓸 수 없게 날뛰기 시작했다.

객관적인 고통이나 아픔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일 뿐인 경험의 척도와 각자가 느끼는 고통은 비례하지 않는다. 타인에겐 별거 아닌 것 같은 사건도 본인에겐 지옥이다. 그렇게 '될 거야, 안 될 거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내 안을 헤집고 다녔다.


타인의 고통

자신의 고통에 민감해지면 그때부터는 타인의 고통도 다 끌어안게 된다. 겪어보지 못한 고통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아픔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온갖 부조리한 것들이 나를 찌르기 시작한다. 남는 것은 '도대체 왜 그래야만 하는가?'란 답 없는 질문이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을 글로 써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에게 있는 것은 공감일 뿐, 어떻게 무엇을 그려야 할지 실체가 없다.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하는 윤리적인 물음도 나를 휘감고 있다. 역시 답이 없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오로지 질문들 뿐이다. 어떻게 해서든 답을 찾고 싶은 헛된 희망과 욕망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 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 결국 남겨야 할 것은 질문이란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한쪽에선 뭔가 있을 것 같다는 헛된 기대가 발목을 잡는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구원과도 같이, 이 말이 떠올랐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나는 매일 조금씩 씁니다.
I write a little everyday, without hope and without despair.
- Isac Dinesen


나는 이 말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란 책에서 읽었다. 그는 소설가 이사크 디네센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도 매일 20매의 원고를 쓴다고 이렇게 말한다.

이사크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 아주 담담하게. ‘희망도 절망도 없다’는 것은 실로 훌륭한 표현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51p)

분명히 "희망도 절망도 없이"라는 말을 한 번 더 언급했음에도, 나는 "매일매일 쓴다"는 말에 의미를 두었다. '역시 작가들은 대단하군, 매일 뭔가를 꾸준히 쓸 수 있다니.'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희망도 절망도 없이"라는 상태값임을 이제야 비로소 알겠다. 매일 조금씩 쓰려면 희망도 절망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매일 조금씩 쓸 수 있다. 그래야 이 무의미하고 부질없어 보이는 하루를 살 수 있다. 그래야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을 견딜 수 있다.


처음 재택근무를 시작했을 때, 원래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았다. 마음 놓고 자료조사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자료조사 명목으로 시작한 일은 어느덧 타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헤집고 있었다.

코로나 19라는 불안은 앞으로 한걸음 떼는 것도 힘겹게 만들었다. 미디어를 통해 들려오는 뉴스는 절망스러웠다. 뉴스에 노출되면 노출될수록 희망은 옅어져만 갔다. 합리적인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고 생각했던 서구 선진국들의 상황은 나를 더 절망에 빠지게 했다. 예측하지 못한 위험과 불안에 노출된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뾰족한 댓글들이다. 타인을 찌르는 댓글들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 걸까. 직접적으로 나를 향한 말들이 아님에도 나도 모르게 내 한 구석이 조금씩 긁히고 있음을 느낀다. 어쩌면 말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라는 말에 기대어 오늘도 일상을 유지하고 작업을 해 나가며 마음도 조금 나아지고 있다. 잘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일도 조금씩 진척을 보이고 있다.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상황은 불안을 조성한다. 거기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어떤 절망 없이, 그러나 또한 헛된 희망에 기대지 않고 오늘을 보내야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정확하게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 뚜렷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어제 멈춘 그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실은 이 말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불안하고 걱정되고 예전과 다른 조금씩 일그러진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것, 알고 있다. 외부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 의료현장과 행정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 우리 모두 믿고 기댈 곳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따스함을 나누면서 희망도 절망도 없이 함께 버티고 같이 나아갔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다면 남는 것은 절망 뿐일 것 같은 절박함에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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