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우울
우울증이 왜 생기는지 명확한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특정한 원인이 있다기보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극심한 우울증에서 한 발짝 벗어난 다음에 비로소 무엇이 원인이었는지 살펴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급격한 상황의 변화는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원인이다. 외부 상황이 변했을 때 우리는 행동은 물론 사고의 패턴 역시 바꿔야 한다. 이때 빠르게 적응하는 경우가 있고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든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나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축에 속했다. 출산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몸과 마음은 물론 내가 매일 마주해야 하는 일상의 과제, 우선순위들이 한순간에 바꿨다. 주변의 도움이 있는 상황에서도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한 동안 멍해지는 때가 있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생각하다 보면 문득 깨닫게 되었다. 과거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밖에도 슬픔이란 "감정"과 슬픔을 일으키는 "외부 요인"에 대해 민감해졌다. 이게 우울증의 원인인지 결과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예전보다 그 감정을 더 깊게 느끼고 더 깊게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진짜 문제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도 슬픔을 느끼고 분노하고 그것이 곧 무기력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나 자신의 슬픔이 아닌 타인의 슬픔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밖에 셀 수 없는 부조리들이 갑자기 내 눈앞에 달려들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부조리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자꾸만 매몰되어갔다.
예술가들을 탄광의 카나리아에 비유하곤 한다. 사회의 모순, 부조리를 누구보다 예민하고 빠르게 포착하여 예술로 승화시키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내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예술의 형태로 표현할 재주가 내겐 없다. 그나마 이렇게 글을 쓸 따름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스스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마저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앤드류 솔로몬이라는 작가가 쓴 <한낮의 우울>. 영어 제목은 THE NOONDAY DEMON이다. 조금 두껍지만 읽으면서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우울과 우울증에 대해 알게 되는 것도 많다. 사람에 따라 내가 겪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기도 한다. 슬픔과 우울에 대해 이 책에서도 다루고 있다.
생태는 운명이 아니다. 우울증을 안고도 얼마든지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 사실 자신의 우울증을 통해 배움을 얻는 사람들은 우울증 체험으로부터 특별한 도덕적 깊이를 얻을 수 있으며 그들의 고통의 상자 밑바닥에 고이 놓여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한낮의 우울, 앤드류 솔로몬, 58p
슬픔도 우울도 우리가 피해 갈 수 없는 감정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함께 공존하는 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지금 그 단계에 있다. 지금 느끼고 있는 날카로운 감정들을 외면하지 말고 그 촉수가 향하는 곳을 깊이 들여다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