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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리어왕의 비극

사랑과 집착을 분별해야

by 생각의 힘 복실이

엄마의 속은 타들어가는데,
딸은 무사태평이다.

마치 오랜 가뭄에 농심 또한 말라가는데,
하늘은 무심히 연일 햇빛을 내리쬐는 것같다.

딸은 이번주 일요일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난다. 출국일은 다가오는데,
아직 유학생비자가 발급되지 않았다.

비자발급센터에 먼저 확인해보면 좋으련만
큰 딸은 선제 조치가 없다.
여러번 물으면, 그제서야, "아, 몰라" 한 마디 할 뿐이다.

그렇다고, 천성이 게으르거나,
대담한 성격도 아니다.
다만, '내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 무신경이라고 생각한다.

내 일로 받아들이면 집중력을 발휘할텐데 그러질 않는다.

마눌은 자꾸 나에게 눈치를 준다.
남편이 나서야 딸이 말을 듣는다는 것인데, 복실이도 기다리기로 한다.

이럴 때는 두달전 받은 생일축하 손편지를 다시 읽는다.

딸의 편지는 중학생 때부터 포맷이 비슷하다.
'Dear 아빠에게'로 시작해서 '사랑하는 딸 올림'으로 끝난다.

가운데 내용은 학년이 올라가며 조금씩 바뀌었다. 중학생 때는 용돈 인상에 대한 감사가 있었고, 고교생 때는 공부에 대한 다짐을 담았다.
대학생이 되어 진로에 대한 고민을 표현했다면 지난 편지에는 아빠의 건강에 대한 염려와 낙관적인 기대를 적었다.

"아빠, 제가 표현은 잘 못하지만,
세상에서 아빠를 제일 사랑해요"

딸이 쓴 이 한 마디를 읽기 위해
아빠는 생일 손편지를 기다렸다.

딸은 지금 제주 여행중이다.
오늘 돌아오는 일정으로 선배언니 둘과 일요일 출발했는데, 오늘 아침 가족 채팅방에 '여행이 너무 좋아 하루 더 있기로 했다'고 카톡을 남겼다.

제주여행 출발전, 나는 어리석은 리어왕처럼 사랑을 확인하려했다.

큰 딸의 손을 잡아 끌어 내 가슴에 갖다대고 묻는다.

"큰 딸, 아빠 가슴엔 딸로 가득차 있는데, 우리 딸 가슴에도 아빠가 들어 있을까?"

딸은 "참내." 별걸 다 묻는다는 표정을 남기고 여행길을 떠났다.

영국의 대문호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중의 하나인 '리어왕'

리어왕은 말년에 세 딸의 사랑을 확인해서 본인에 대한 딸의 사랑 표현만큼 왕국을 분할해서 나눠주겠다고 선언한다.

약삭빠른 첫째와 둘째는 교언영색과 미사여구를 동원해 왕을 눈속임하나, 막내딸 코딜리어는 '표현할 수 없을만큼 사랑했기에' 그 효심을 고백하지 못한다.

어리석은 리어왕.
본인이 말한 대로 좋은 말로 표현한 첫째와 둘째에게 왕국을 쪼개주고,
가장 사랑했으나 묵묵부답이었던 막내딸 코딜리어는 프랑스왕에게 내쫒듯 시집보낸다.

하지만 리어왕은 첫째, 둘째에게 배신당하고 결국 가족 모두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리어왕의 비극은 무엇 때문인가?

딸의 사랑을 확인하고싶은 부모의 마음이 비극의 씨앗은 아닐 것이다.
또한, 차마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막내딸의 잘못도 아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자녀 양육에 대한 나만의 개똥철학.

10여년전 애들 성적을 화제로 술한잔하다 친구가 한 말을 기억한다. 그 날의 술자리에서 내 개똥철학이 생겨났다.

"집착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이다."

세익스피어는 어리석은 '리어왕'을 통해 아첨과 진심을 구분하고, 집착과 사랑을 분별하는 현명함을 갖추도록 후세에게 권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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