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의사과학자 류박사 Jun 20. 2024

논문 작성은 처음이라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연구의시작 #연구논문 #논문작성기 #첫논문 #기록 #의예과 #의대생 #의대생방학



【 평범했지만 특별했던 수업 】


의과대학 의예과 2학년 시절, 직업환경의학과 사공준 교수님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방학 동안 재미있는 활동을 하고 싶은 학생들을 모집하셨습니다. 논문을 써보고 싶다면 동아리 활동처럼 해보자고 제안해 주셨습니다.


영남대학교 의예과 학생들은 대부분 방학 때 예체능 동아리 활동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동아리 활동은 선후배, 동기들과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가시적인 성과물은 없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런 점을 지적하셨고, 저는 쉽게 설득되었습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씀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합니다. 다른 동기들에게는 평범한 수업시간이었겠지만, 저에게는 특별했습니다. 



【 나는 어떻게 기억이 될까 】


20대 초반에 저는 내가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20대가 그렇듯이요. 하지만 만약 기록하지 않는다면, 제가 떠난 뒤에 제 활동과 생각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 설레는 연구의 시작 】


무작정 친구 2명과 함께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박재우(현 마산의료원 정형외과), 박소희(현 영남대병원 신경외과 교수) 학생이었죠. 교수님께서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셨는지 놀라셨습니다.


먼저 주저자와 공저자를 정해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저자 역할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지만, 제가 이 작업을 제안했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기에 주저자(1저자)를 맡기로 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여러 주제를 제안해 주셨는데, 대구 지역 수영장 이용자의 눈과 피부 증상 조사가 해볼 만한 것 같았습니다.



【 설문조사의 낭만 】


먼저 설문 항목을 만들기 시작했고, 교실 교수님들과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의예과 2학년 생은 거의 비의료인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 설문지 작업에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설문지가 완성되자 대구 8개 구 수영장을 임의로 선택해 설문조사를 다녔습니다. 수영장을 하나씩 선택하는 게 무척 신났습니다. 아무 인연도 없는 수영장에 찾아가 직원들에게 허락을 받고, 선생님과 이용객 분들께 설문에 응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대학생이 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용기가 났습니다. 당시 지인의 도움으로 각 수영장 실무자와 연결될 수 있었고, 어떤 곳은 무작정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동기들과 다니며 설문하고 식사하니 소풍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지역 주민 분들도 적극 협조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결실을 맺다 】


1달 후 수작업으로 자료를 입력했는데 시간이 꽤 걸렸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이제 통계 분석을 해야 했는데, 의예과 시절 통계 수업이 어려웠던 터라 교수님들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통계 분석을 경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직업환경의학과 학술대회에서 포스터 발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하지만 의예과생으로서는 글쓰기 능력이 부족해 논문 작업 완성까지 2년이 더 소요됐습니다. 요즘 같으면 인공지능툴을 활용해 더 수월했을 것입니다. 2년 뒤 전만중 교수님 도움으로 "대구지역 수영장 이용자의 피부와 눈 관련증상 경험률"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그림 1)

(https://doi.org/10.5668/JEHS.2012.38.4.340)


그림 1. 출판했던 논문의 제목과 초록



【 연구자로서의 첫걸음 】


저는 이후 어떤 직장에 이력서를 내더라도 이 출판물을 가장 먼저 언급합니다. 이 논문은 SCI급 저널은 아니지만 의과대학생이 직접 만든 결과물이라 자랑스럽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생해서 만들었기에 결과가 뿌듯합니다. 또한 의과대학생 신분으로는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값진 기회였죠. 이 논문을 계기로 연구자의 삶을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이 기회를 주신 사공준, 전만중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후 연구원 시절 의대생들이 파견 와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물론 요즘 주제는 최첨단 융합의학이라 발로 뛰는 경험과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학생 때 연구를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나중에 큰 자산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연구와 글쓰기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