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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사과학자 류박사 Jun 27. 2024

헌혈, 사랑의 시작 – 12리터의 헌혈 여정

달구벌의 씨앗, 빛고을의 꽃, 화성의 열매: 헌혈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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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헌혈의 추억 】


2007년 12월 23일, 대학교 의예과 1학년 때 처음으로 헌혈을 경험했습니다. 대구 동성로 헌혈의 집 근처에서 유명한 떡볶이를 먹고 싶어 지나가던 중, 연말 분위기에 저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대학생이었던 저는 경제적으로 남을 도울 여력이 되지 않았기에, 눈앞에 보이는 헌혈의 집에서 제 혈액이라도 기부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날의 기억은 잊을 수 없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무서운 은사님의 헌혈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선생님이 정기적으로 헌혈을 한다는 사실에 복잡한 양가감정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체벌이 일상적이었던 시대였고, 그 선생님은 무서운 분에 속하셨는데, 그런 분이 헌혈을 정기적으로 하신다니 복잡한 심경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정기적인 헌혈 활동이 저에게는 의외로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이때의 기억이 대학교 1학년 때 헌혈의 집을 보고 저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대학생 시절 헌혈 여정 】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서 확인해 보니, 대학생 시절 총 6회의 헌혈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의예과 1학년 때 첫 헌혈을 시작으로, 의예과 2학년 때 1회, 의학과 2학년 때 2회, 의학과 3학년 때 2회씩 헌혈에 참여했죠. 의예과 2학년과 의학과 2학년 때의 헌혈 기록을 살펴보니, 의학과 3학년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 겨울철에 헌혈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차가운 계절에 누군가에게 온기를 나누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의학과 3학년 때는 의학전문대학원-의과대학 학생회장을 맡으면서, 전국 의대생 릴레이 헌혈 행사를 주관하며 2차례 헌혈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학생회장으로서 헌혈에 솔선수범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헌혈을 권유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학창 시절에는 헌혈의 집이 대학 캠퍼스 근처에 없다는 이유로 많은 헌혈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대학생 시절 동안 총 6회의 헌혈을 마치고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 전공의 시절과 특별한 헌혈 】


대학 졸업 후, 인턴과 정형외과 전공의 시절에는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 헌혈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헌혈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한두 번씩 헌혈을 하긴 했지만, 정기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2017년 12월, 정형외과 전문의 시험을 며칠 앞둔 시점에 특별한 계기가 생겼습니다. 요즘은 많이 사라진 제도이지만, 전공의 특별법이 생기기 전에는 저년차 때는 힘든 일을 많이 하고, 고년차 때는 전문의 시험 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업무를 줄여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3년차 말에 전공의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저년차 때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했고, 고년차가 되어서도 평등하게 많은 업무를 감당해야 하는 끼인 세대가 되고 말았죠. 이런 상황이 다소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11월 말쯤부터는 본격적인 수험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수험생활을 하던 중 10여 년 전 첫 헌혈을 했던 대구 동성로를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대구 동성로 헌혈의 집을 지나면서 첫 헌혈의 기억이 떠올랐고, 그 당시 제 마음이 벼가 익어가는 시기처럼 너그러워진 것 같았습니다. 이에 헌혈의 집으로 들어가 기꺼이 헌혈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었죠. 힘든 전공의 시절이 곧 끝날 거라는 생각에 정기적으로 헌혈을 해보자는 결심도 섰습니다.


사실 전공의 때는 병동에서 수십 명의 환자들에게 매일같이 수혈 처방을 내렸지만, 정작 제가 의사로서 헌혈을 몇 번이나 해봤는지, 그리고 그런 처방들을 내리면서 과연 헌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봤는지 돌아보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의 변화는 군복무를 시작하면서 헌혈을 정기적으로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고, 정형외과 의사로서 지식적으로 가장 많이 성장하고 마음의 여유도 생긴 이 소중한 시기에 그 다짐을 실천해 보기로 했습니다.



【 군 복무 시절의 헌혈 활동 】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 후, 저는 병무청 병역판정전담의사로 군 복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018년 4월, 첫 부임지인 광주전남지방병무청에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USMLE(미국의사국가고시) 공부를 시작했던 저는 근무가 끝나면 매일 같은 동구에 있는 조선대학교 중앙도서관 1층으로 공부를 하러 걸어갔습니다. 조선대학교 안에 있는 헌혈의 집을 발견한 저는 부임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주저 없이 헌혈에 동참했습니다.


대구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헌혈을 하는 것도 처음이었기에, 제가 기증한 혈액이 광주에 계신 환자분께 수혈될 거라 생각하니 그분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죠. 대구에서 온 청년의 헌혈로 광주의 환자분께 수혈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피로 맺어진 지역 간의 화합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대구광역시와 광주광역시는 옛 이름이 '달구벌'과 '빛고을'이라 '달빛동맹'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지역 사회 인사들의 교류가 활발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 간 교류와 화합이 단순히 사회 지도층뿐만 아니라 저와 같은 평범한 시민들의 참여로 더욱 깊어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광주에서의 6개월 동안 저는 조선대 헌혈의 집에서 총 3차례의 전혈 헌혈을 하게 되었습니다. 2달에 한 번씩 꾸준히 방문하니 마지막 3번째 방문 때는 제가 의료인이자 병무청에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 중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렸죠. 저의 경험으로는 의료진임을 밝히면 헌혈의 집 선생님들께서 부작용 설명을 하실 때 조금 더 편안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헌혈 후 중대한 부작용 발생 시 그에 대한 설명 여부가 법적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의료인인 저도 잘 알고 있기에, 이를 사전에 밝힘으로써 설명에 대한 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해 가을, 저는 전북지방병무청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고, 전주 한옥마을 인근의 고사동 헌혈의 집에서도 헌혈에 동참했습니다. 제 피를 받으신 분들이 모두 건강하시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이렇게 광주에서 3차례, 전주에서 1차례 등 총 4차례에 걸쳐 전라도 지역에서의 헌혈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사진 1)


사진 1. 헌혈 30회의 순간들 매 순간 다른 장소에서, 하지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어온 헌혈의 여정입니다.



【 병역판정전담의사를 위한 헌혈 공가제도 개선 】


사실 공무원법에는 헌혈 시 공가를 쓸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병역판정전담의사 복무지침에는 그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1년 차 때 이미 4차례나 헌혈을 했기에, 이 제도를 병역판정전담의사에게도 적용하여 더 많은 의사들의 헌혈 참여를 독려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건의를 드렸고, 다행히 복무지침이 신속하게 개선되었습니다.


헌혈 후에는 온종일 자세 변경 시 식은땀이 날 정도로 피로감이 크기 때문에, 체액 손실로 인한 신체적 변화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헌혈 후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공가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복무지침 개선으로 인해 병역판정전담의사 중 누군가는 헌혈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 꾸준한 헌혈의 여정 】


병역판정전담의사 복무 2년 차부터는 경기도 수원시에 위치한 경인지방병무청으로 자리를 옮겨 2년간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수원에서도 저는 5차례의 전혈 헌혈을 하였고, 이후 현재 거주 중인 서울에서도 정기적으로 헌혈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혈로만 총 30회의 헌혈을 달성하여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유공패를 받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사진 2) 총헌혈량으로 따지면 12리터의 혈액을 기증한 셈인데, 이는 성인 3명의 전체 혈액량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수치로 환산해 보니 제가 헌혈한 양이 결코 적지 않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사진 2. 30회 헌혈의 결실, 대한적십자사 유공패 획득



우리나라는 늘 혈액 재고량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접하곤 합니다. 의사로서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마음 편치 않았고, 앞으로도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정기적으로 헌혈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작은 실천이 모여 큰 변화를 이끌 수 있듯, 많은 분들께서 헌혈에 대한 관심을 가져 주시길 바라봅니다. 헌혈에 참여하고 싶으신 분들은 가까운 헌혈의 집을 방문하거나, 대한적십자사 홈페이지에서 더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달구벌의 씨앗, 빛고을의 꽃, 화성의 열매: 헌혈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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