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걷는다.
"나는 걷는 것이 좋았고, 걷기를 열망했다. 다만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나는 걷는 것이 싫었다. 매일 정해진 루틴 안에서 책과 마주하는 시간을 조금 더 갖고 싶다는 열망은 가져본 적이 있으나, 걷는 것을 열망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배우 하정우가 쓴 책 <걷는 사람>을 읽고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나였다.
빌 브라이슨의 책 <나를 부르는 숲>은 세상에서 가장 유니크한 여행작가의 애팔래치아 종주기라고 했다. 기대하며 펼친 책은 빌 브라이슨과 친구 카츠의 너무나도 현실적인 트레일 종주기를 보여준다. 티격태격하면서 함께, 때로는 따로, 걷고 또 걷는 모습이 얼마나 힘든지, 하마터면 그들에게 이제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얘기할 뻔 했다. 특히 가방에 들어있던 물병까지 집어던지는 카츠의 모습에는 달려가 주워주고 싶었고, 그래 나라도 그러고 싶었을거야 라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너무나 쉽지 않은 그들의 좌충우돌 트레킹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 이상하다. 걷는 걸 싫어하는 내가 올레길을 한번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일 아침, <나를 부르는 숲>을 읽다가 문득 동네라도 걸어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가족들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5월 19일, 물과 간식을 가방에 챙겨 율하공원에서 혁신도시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햇빛은 나만 따라오는지 아주 뜨거웠고, 처음 가보는 길로 걷다보니 큰 길로 빠지는 길을 찾지 못해 구글 지도도 잠시 켰다. 힘들었지만 가족이 함께 유럽여행을 다니면서 모르는 길을 걷고 또 걷던 기억이 났고, 우리 셋은 여행지에서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깔깔깔 웃음을 주고 받았다. 발이 아프다는 아이와 운동화를 바꿔 신으며 한참을 걸었고, 돌아오는 길은 슈퍼맨처럼 짠~하고 나타난 동생의 차를 이용했다.
5월 22일, 아이에게 새 운동화를 사서 신겼다. 힘든 것보다 걷는 게 심심하다는 딸 아이에게 걷기 기록표를 만들어주고, 맛있는 점심을 사주겠다고 하고 이번에는 율하공원에서 동촌유원지까지 또 한참을 걸었다. 12년을 산 우리 동네 공원길이 야생화 식재지 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바람을 느낀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매일 콘크리트 벽에 갇혀 생활하다가 한참을 걷고, 또 걷는데 바람은 나를 밀어내기도 하고, 끌어당기기도 하면서 멀리 더 멀리 걸어가게 했고, 마스크 바깥으로 느껴지는 꽃 내음과 초록 바람 내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5월 29일, 이제 걷기 힘들어하는 아이가 잠든 시간에 남편과 함께 동네를 걷기로 했다. 공원 뒷편에 있는 다리를 건너가니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있어 이전보다 짧은 시간을 걸었는데도 더 힘들다. 평소 운동이라고는 하지 않는 내가 왕복 3시간을 걸어도 별로 힘들지 않아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마 평지만 걸어서 그랬나보다. 6월 6일, 6시에 일어나 지난주처럼 남편과 1시간을 걸었다. 늘 출발은 공원에서 시작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함께 걸어가본다. 잠시라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는 시간이다.
나는 요즘도, 때로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집 근처의 트레일로 등산을 다녀오곤 한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상념에 잠기지만, 항상 어떤 지점에 이르면 숲의 감탄할 만한 미묘함에 놀라 고개를 들어본다. 기본적인 요소들이 손쉽게 모여서 하나의 완벽한 합성물을 이룬다. 어떤 계절이든 간에 멍해진 내 눈길이 닿은 곳은 모두 그렇다. 388p
"엄마, 그런데 갑자기 왜 걸어?"
"나? 운동하려고,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는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걸으면 환경보호에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대충 얼버무렸다. 아이의 질문에 좀 더 멋진 답을 했더라면, 아이는 지금 함께 걷고 있을까?
건강검진 결과의 시그널은 운동의 필요를, 빌 브라이슨의 책 <나를 부르는 숲>은 진짜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스트레스로 찌그러진 마음에 햇빛을 쬐어 소독하고, 바람을 불어 넣어 살짝 펴 본다. 내가 사는 동네, 대프리카의 아침은 벌써 덥다. 그래도 남편과 함께여서 오늘도 걷는다.
2021.06.11. 어른이 되어가는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