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갈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잌쿤 Sep 22. 2017

'종이 여자'가 알려주는 러브 테라피

종이 여자 / 기욤 뮈소

꽤 오랜 시간 만남을 이어가다가 이별을 경험한 사람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는 겨우 수개월만에 결혼을 결정해버리는 상황을 종종 접할 수 있다. 대체로 '반쪽'과 같은 사람을 잃었다는 깊은 상실감과 허전함을 이기게 해 준, 또 다른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다소 성급할 수도 있는 결정을 내리는 것 같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실연 앞에서 누구도 의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두가 사랑을 갈구하지만 언제나 실연이 있고 아픔이 있는 이유는 아마도, 비대칭적일 수밖에 없는 사랑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순수한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피드백이 없는 베풂을 영속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종이 여자 / 기욤 뮈소

"종이 여자". 제목부터 특유의 러브 판타지를 암시하는 기욤 뮈소의 이 소설에서 그는 여섯 명의 인물을 통해 사랑의 비대칭성을 묘사한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다양한 장소와 인물의 시점에서 서로 얽힌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소설은 주인공 톰과 그 주변 인물을 중심으로 때로는 긴박하면서도 또 천천히, 사랑에 대한 저마다의 해법을 만들어간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여섯 명의 남녀는 각자 사랑 앞에서 보이는 태도가 달랐고, 그래서 상처를 입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사랑을 믿고 누군가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남자를 단기간의 위안거리로 삼는 오로르와 그로 인해 깊은 상실감을 안고 폐인이 되어버린 톰의 비대칭. 그런 톰이 사랑에 대한 절망감을 투영하여 창조해낸 '나쁜 남자' 잭과 그 때문에 상처를 입고도 잭을 그리워하는 빌리의 비대칭. 어린 시절 톰에 의해 구원받았으나 여전히 남아있는 상처로 사랑을 두려워하게 된 캐롤과 그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밀로의 비대칭.


나는 끝까지 어리석게도 내가 그녀가 닻을 내릴 항구가 될 수 있을 거라, 그녀가 내 여자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 지속적인 관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이었다. 애매모호한 태도와 질투심을 무기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익숙해져 있던 오로르와는 그런 차분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소설은 결론으로 다가가며 점차 등장인물들이 비대칭적인 사랑의 속성을 극복하고 '정상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톰이 소설을 통해 잭과 빌리의 비대칭을 창조한 것은, 사랑에 대해 손해만 보아왔던 자신의 무기력함과 그런 무기력을 안겨준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복수심이 투영된 결과일 것이다. 하이드라는 악한 본성을 아무도 모르게 드러내며 내적인 면죄부를 선고한 지킬 박사처럼, 그렇게 톰은 잭의 이름을 빌려 가상의 '종이 여자' 빌리에게 내면을 폭력성을 마음껏 표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톰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사람은 그가 당한 것과 똑같은 상처를 입혔던 또 다른 피해자 빌리였다.


"아마도 내 안에 있는 악마적인 근성들을 당신이라는 인물을 통해 표출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가장 혐오스러워하는 음험한 부분들, 내게 결코 용납이 안 되는 모습들, 때로 내게 인간쓰레기라는 느낌을 주는 그런 내면의 악마들."


소설 속에서 톰은 두 번 실연을 경험했고, 두 번 모두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그러나 두 번의 실연이 각각 톰의 삶에 미친 영향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사랑에 냉소적인 오로르와의 이별은 톰을 약물중독으로 피폐하게 만들고 다시는 소설 집필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뜨린 반면, 순수한 사랑의 가치를 알고 있던 빌리와의 이별은 톰에게 실연의 아픔 속에서도 삶에 활력을 주었고 새로운 소설을 써 내려갈 에너지를 만들었다.




톰이 잭과 빌리의 나머지 이야기를 결국 어떻게 집필하였는지는 소설에 등장하지 않지만 여러 부분에서 그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빌리는 헌신적인 힘으로 잭을 변화시켰으며 개과천선한 잭은 빌리가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두 사람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결국 빌리를 통해 사랑의 비대칭적 문제를 극복하고 삶의 힘을 얻은 톰은 소설 속에서도 그러한 영향을 투영하여 등장인물을 긍정적 결론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사랑에 실패했다고 폐인이 된다면 미친 짓 아닐까?"

밀로가 분을 못 이겨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캐롤이 그를 쓸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미친 짓인지는 몰라도 세상에서 아주 흔한 일이긴 하지. 내 눈에는 그런 미친 짓이 오히려 퍽이나 인간적이고 감동적으로 보이기도 해."


한편 톰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캐롤은 사랑을 두려워하는 인물이다. 트라우마로 인해 감정 표현을 꺼려하는 캐롤이 톰에게 보이는 열정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빚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밀로는 사랑에 냉소적인 척 연기하지만 사실은 사랑에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짐짓 사랑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강한 척 하지만, 결국 캐롤이 용기를 내어 과거의 상처를 고백하고 나서야 그는 캐롤 앞에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었다. 사랑에 대해 각자의 두려움을 간직한 두 남녀는 서로 그것을 인정하면서 비대칭적 감정의 괴리를 극복했다.


당신의 일부가 내 안으로 영원히 들어와 마치 독약처럼 퍼졌습니다


결국 소설에서 인물들의 변화를 통해 읽어낼 수 있는 메시지는 똑같이 상처를 남긴다고 하더라도, 어떤 형태의 사랑을 했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끝없이 소모를 고집하면서 피폐해져 갈 수도 있고, 진실된 사랑을 만나 아프지만 아름답게 회상되는 추억을 남길 수도 있다. 어떠한 방향으로든 사랑은 몸속 깊숙이 퍼지며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것이 독약이 될지 활력이 될지는 누구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상처를 입고도 또다시 사랑을 갈구하는가 보다.


네이버 책 정보 : 종이 여자

평점 ★★☆

reviewed by lkhoon



매거진의 이전글 인권을 짓밝힌 여성들의 투쟁, 그리고 작은 희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