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배낭 멘 청춘들이 전국을 떠돌게 만드는 철도 패스가 출시됐다. 이름하여 '내일로' 패스다. 어려서부터 여행을 좋아했던 나는 철마다 몸이 동하곤 했는데, 이런 저렴한 승차권의 출시는 혁명과도 같았다. 소속이 없었더라면 몇 주라도 돌아다녔을 텐데, 사회복무요원으로 소방에 몸 담을 때라 일주일 정도가 전부였다.
두 해에 거쳐 비슷한 친구들과 다녀왔더니 지금은 순서도 경로도 헷갈리지만 유독 기억에 남은 여정이 있다. 청량리역을 출발해 정선과 강릉을 거쳐 부산으로 향하는 일정이었다. 주머니가 얇아 노숙과 야영을 번갈아 했는데 첫날은 노숙을 할 생각으로 늦은 밤 증산역(현 민둥산역)으로 향했다. 돈을 아끼려니 짐은 많아져 부모님께 물려받은 낡은 텐트에, 저녁 삼아 먹을 친구네 집 김밥까지 들고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세 시간 조금 넘게 걸려 비 오는 증산역에 도착하니 새벽 2시 반 언저리였다. 대합실 구석에 돗자리를 깔고 침낭을 덮고 눈을 붙였다. 무더운 여름밤 산모기들과 딱딱한 바닥에 괴로웠지만 여행의 시작이라 한껏 들떴다. 대합실에는 우리 말고도 정선선 첫 차를 기다리며 졸고 있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기차 탈 때가 되니 비는 그쳤고 안개만 자욱했다. 정선아리랑 가사에도 등장하는 아우라지에 도착했을 땐 간밤에 내린 비로 무섭게 불어난 강물이 우리를 반겼다. 멋있다기보다는 공포스러운 수준의 흙탕물이 미친 듯이 흐르고 있었다. 즐길만한 경치도 딱히 없는데 비는 다시 몰아쳐 곤란해진 우리는 버스를 타고 그 유명한 정선 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비 맞으며 도착한 시장은 역시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시장이라면 역시 작고 허름한 식당에서 현지식을 먹는 게 제맛이니 배고픔만큼의 기대감을 안고 곤드레밥집에 자리를 잡았다. 배낭 메고 홀딱 젖은 우리를 따뜻한 미소로 맞아준 집이었다. 곤드레밥에 묵사발, 올챙이국수에 옹심이까지 욕심내 잔뜩 시켰는데 시장 인심이 좋다고 전병까지 내어주셨다.
그런데... 한 입씩 뜨던 우리는 점점 말을 잃고 말았다. 서비스로 받은 전병을 제외하곤 너무 맛이 없어 모두에게 버거웠던 것이다. 어리고 배고플 때라 입에만 들어가면 뭐든 많이 먹던 우리지만 이건 도저히 들어가지 않는 맛이었다. 그때부터 생긴 강원도 음식에 대한 끊임없는 불신이-슬프게도-지금까지 내 머리 한 편에 자리하고 있다.
정선에서의 실패를 안고 도착한 강릉은 다행히 상냥했다. 사천 해변에 텐트를 치고 하루를 보내려 무작정 걷는데, 지나가던 주민이 트럭으로 우리를 데려다줬다. 바다에 발도 담그고 파도소리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드럼통을 반으로 쪼개 놓은 모양의 좁고 낡은 텐트였지만 바닥이 모래사장이라 지난밤보다 훨씬 편안했다. 해변가에 번듯한 숙소들이 즐비했지만 그때는 모래사장이라 더 즐거웠다.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짐을 꾸리고 시내로 향했다. 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지로 향하는 날이었는데 새벽 6시 기차를 놓치면 하루 종일 방법이 없었다. 기차 시간보다 훨씬 앞서 시장에 가서 장을 봤다. 정확히는 시장 상인들이 물건을 사는 새벽 도매시장이라 우리에게 맞진 않았지만 상냥한 상인들은 소량이라도 팔아주었다. 감자, 파프리카, 버섯 등을 사다가 알배추도 한 통 얻고 편의점 소시지로 바비큐를 준비했다.
막 문을 여는 철물점 사장을 보채 번개탄과 작은 석쇠를 사고 기차역으로 뛰어가던 여름 아침의 풍경이 생각난다. 목적지인 승부역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마실 물과 술까지 모두 쟁여서 기차에 올랐다.
경상북도 봉화군 산골에 있는 승부역은 아침 8시 반, 저녁 7시쯤 두 번 무궁화호가 설뿐 차로는 갈 수 없는 오지역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지에 있는 역으로 유명세를 탔을 정도니 알만하다.
그 당시 전국의 기차역들은 실적 때문인지 지역 부흥 때문인지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했다(분명히 실적 때문이겠지). 내일로 티켓을 특정 역에서 발권하면 투어를 시켜준다든지, 선물을 준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지역 명소 입장권을 깎아주는 곳도 있었고 역무원 숙소 한편을 내어주기까지 했다. 우리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승부역에서 하룻밤 재워준다는 혜택 하나만 보고 춘양역에서 티켓을 발권했으니, 승부역으로 향하는 건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다. 새벽부터 본 장을 가득 안고 2시간 넘게 달려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막 넘어갔을 즈음 우리는 승부역에 닿았다.
승부역은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었다. 오래된 작은 역이지만 버려져 남루한 모습은 아니었다. 깔끔하고 단순한데 코너를 따라 완만하게 휜 승강장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승강장 위에는 버스 정류장 만한 아주 작은 대합실이, 상행선 철길 건너에는 아담한 역무실이 보였다.반대편 하행선 철길 건너에는 이제 조금 강 같은 모습이 된 낙동강이 조용히 흘렀다.
우리와 함께 기차에서 내린 승객은 약간의 짐을 가진 노부부가 전부였는데 기차에서 내리는 것조차 벅차셨는지 바로 대합실 의자에 걸터앉았다. 도와드려야 하나 생각하는 찰나 어디선가 홀로 일하는 역무원이 등장해 반갑게 인사를 드리더니 짐 나르는 걸 도왔다. 서울에서 태어나 일산에서 컸던 나에게 이만큼 영화적인 현실은 드문 광경이었다.
노부부를 배웅한 역무원은 승강장에 덩그러니 있는 우리에게 잘 왔다며 웃어줬다. 역무원 숙소 한 편의 방을 배정받고 벌써 쌓여버린 빨래를 했다. 승강장 옆을 흐르는 낙동강에서 빨래를 했다면 더 극적이었겠지만 화장실에서 손빨래를 해 널고 나니 졸지에 할 일이 없어졌다. 비록 24시간 머물다 떠나는 게 전부니 금방이라면 금방인데, 문 열고 나서면 낙동강 말곤 아무것도 없으니 도시 촌놈이던 우리는 그저 뒹굴기만 했다.
방에서 뒹굴기도 지겨워 낙동강으로 내려가니 마을 가족들이 강 건너에 소풍을 나와 있었다. 눈웃음 하나 잘 치던 친구가 가서 인사하고 말을 섞더니 이내 작은 수박을 하나 얻어왔다. 마트에서 파는 수박만 봤던 나는 그런 작은 수박도 있냐며 코웃음 쳤다.없는 살림에 입에 넣을 건 모자랐던 여행인데, 작다고 무시한 그 수박은 그날 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아이 머리만한 수박이었다
밤이 되자 밤 기차를 타고 몇몇이 승부역에 도착했다. 우리끼리 심심했던 터라 옆 방 친구들을 꾀어 함께 바비큐를 하기로 했다. 말이 바비큐지 땅을 조금 파 번개탄을 넣고, 양쪽으로 돌 괴어 쥐포나 구울법한 작은 석쇠를 얹은 게 전부였다.
새벽 포장마차에서 얻어온 어묵 꼬치에 소시지와 야채를 꽂아 구워 먹었다. 혼자만 있었다면 너무 무서울 정도로 깜깜한 그곳에선 가끔 지나가는 영동선 불빛이 반갑기도, 두렵기도 했다. 먹을 거라고는 번개탄에 구운 싸구려 꼬치와 얻어온 수박이 전부였던 그 밤. 처음 보는 친구들과 어색하게 인사하며 잔을 기울이는데 누군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늘 좀 봐."
고개를 살짝 들어 하늘을 보려다,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멀리 승강장 쪽 신호등을 제외하면 아무 불빛도, 가로등도 없던 승부역의 하늘은 황홀했다. 어마어마한 별빛을 느끼며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는데,철길 건너 흐르는 강물 소리가 사운드트랙처럼 흘렀다.
딱 이런 느낌이라 기억된다
짐이 무거워 소주도 양껏 사 가지 못했거늘, 그마저도 나눠 마시는 바람에 원 없이 취하지도 못했거늘, 그 별빛과 강물소리 이후로는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별을 보며 자라지 못해 너무 생경했던 걸까, 아니면 빛과 소리에 취했던 걸까.
조만간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벌써 10여 년이 흘렀다. 지도를 찾아보니 어떤 역은 이름도 바뀌었고 길도 조금 편해져 차로 쉽게 닿는가 보다. 다시 찾아도 왠지 그때의 감흥은 없을까 봐, 다시 찾으면 그때의 추억을 잊을까 봐, 그저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