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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멀스멀 Oct 17. 2019

덕후가 더쿠에게

우리 더쿠 못 잃어

 치앙마이 한 달 살기의 마지막은 욕심을 조금 내 수영장이 딸린 호텔을 잡았다. 수영도 할 줄 모르고 물을 무서워 하지만 물가에 있는 건 또 좋아하기 때문이다. 함께 여행하는 짝꿍과, 후반부에 합류하는 지인은 학생 때 선수까지 할 정도로 수영을 잘해서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었다. 1박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곳은 아니고 5만 원 정도였지만 우리 사정에서는 아주 호화로운 숙소였다. 지난번 짧은 여행에서 묵어보고 정말 마음에 들었던 터라 주저 않고 예약했다.


호텔 4층에서 바라본 수영장


 예쁜 수영장에 튜브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커다란 짐볼 하나와 누군가 두고 간듯한 어린이용 키판이 전부라는 걸 지난 여행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물이 무서운 나도 둥둥 떠다닐 수 있고 일행과 재밌게 놀려고 커다란 튜브 하나와 저렴한 비치볼 하나를 구입했다. 저렴해도 아무거나 살 수는 없으니 심사숙고 끝에 귀여운 미니언즈 그림이 있는 노란 공을 들였다. 여행 전 집에 도착한 튜브를 시험 삼아 입으로 불어보니 도저히 입으로 불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결국 잡화점 파티용품 코너에서 풍선 부는 손펌프까지 장만하니 한 달 살기 가는 짐이 점점 무거워졌다. 출국을 앞두고 집을 정리하다 언제 들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손펌프와 비치볼을 창고에서 찾은 우리는 허탈했다. 하필이면 우리가 새로 구입한 것과 같은 노란색. 귀여운 오리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는데, 어차피 저렴하게 산 비치볼을 환불할 것도 아니니 둘 다 챙겨 넣기로 했다. 이렇게 한 달 살기 마지막 숙소에서 쓰기 전까지 들고 다닐 짐만 계속 늘었다.


 창고 한편에서 찾은 비치볼은 면세점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모양이다. 공 한쪽에 S면세점 로고와 함께 오리 캐릭터의 이름인 더쿠 DUCKOO가 적혀있었다.* 아마도 오리의 영어단어와 오타쿠를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표현인 덕후와 버무린 이름 같다.** 더쿠는 항상 좀 뚱한 표정으로 있는 오리다. 어떤 캐릭터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집에서 잉여롭게 뒹굴며 영화 보고, 컴퓨터 하고, 책 읽다가도 꽂히는 일은 기어코 하는 오리란다. 여행을 좋아해 캠핑을 떠나기도 하고 남의 시선보다 스스로 만든 행복을 얻는 스타일이란다. 읽어보니 여행 멤버인 우리 셋과 딱 어울리는 캐릭터다. 우리 셋은 모두 미드를 좋아하는 덕후들이다.*** 10년 전쯤 덕질하는 모임에서 알게 되어 여태껏 이어진 인연이다. 집에서 뒹굴면서 미드를 보고, 컴퓨터를 하고, 책을 읽는다. 그러다 꽂히는 곳이 있으면 함께 여행을 가기도 하니 더쿠까지 합해 네 명의 덕후가 함께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사은품으로 받았을게 분명한 DUCKOO 비치볼


 취미가 비슷해 친해진 사이니 우리는 여행도 곧잘 다녔다. 다른 멤버들이 더 붙을 때도 있고 둘이서나 셋이서만 갈 때도 있었다. 이제는 여러 해 지나 헷갈리는데 아마도 첫 번째는 임자도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전라남도 임자도에서 영어선생을 하는 영국인 친구를 만나러 다녀왔다. 그다음은 아마도 삼척. 임원항 한편에 고무대야 놓고 파는 회와 대게를 사다가 작은 민박집에서 소주잔 기울이던 기억이 난다. 한강 나들이 정도로 시작된 우리의 여행은 임원에 삼척을 거쳐 일본, 대만을 찍고 치앙마이에 이르렀다. 덕후들끼리 모이면 오히려 덕질 얘기는 안 한다고 사는 얘기, 직장 얘기가 대부분이지만 아직도 종종 미드나 영화를 함께 보며 술잔을 기울인다. 잠깐, 모든 장면에서 술잔이 빠지지 않는 것 보면 술 덕후 모임 같기도 한데. 뭐, 한 가지만 덕질하란 법은 없으니까.


 치앙마이의 9월은 우기의 끝자락이다. 드물게 몇 시간씩 폭우가 오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종일 쨍하다. 차라리 시원한 소나기가 지나가면 좀 시원해지는데 아주 살짝만 흩뿌리면 습도만 괜히 높아진다. 한낮에 30도를 웃돌고 햇빛도 뜨거우니 돌아다니기 여간 괴로운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늦은 오후에 외출하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 외출할 때까지 우리의 일과는 대부분 수영장에서 이뤄졌다. 느지막이 일어나 수영장 옆 로비에서 배달 음식으로 아점을 해결하고 바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외출하기 전에 제대로 씻어야 하니 그 전까진 수영장에 몸 담그고 세월아 네월아 둥둥 떠다니기만 한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새소리 들으며 떠있다 보면 여기가 천국이지 어디 멀리가 찾을 필요 없겠다 싶어 진다.


수영장에서 보낸 시간들


 심심함을 즐기다 좀 심하게 심심하다 싶으면 우리는 공을 던지고 놀았다. 배구하듯 주고받기도 하고, 지겨워지면 튜브를 골대삼아 내기를 했다. 진 사람이 세탁비 내기를 했는데 다 말려 개켜주기까지 하는 세탁비가 1kg에 40밧. 우리 돈 1,500원이다. 세상 좋은 섬유유연제 냄새까지 나서 다시 빨기 아까운 지경인데, 아무튼. 1,500원 걸고 하는 내기란 긴장감 따위 있을 리 만무해도 재밌었다. 내기가 끝나고 나면 다시 공 껴안고 둥둥, 튜브 위에 엎드려서 둥둥. 그렇게 세월을 낚는 강태공처럼 시간을 보내다 천국에 질릴 때쯤 튜브와 공을 하나씩 챙겨 들고 방으로 향했다. 이러고 보면 누군가의 말마따나 죽고 나면 날씨만 좋고 심심한 천국보다 친구들 다 가있을 지옥에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더쿠는 이미 물에 둥둥 떠있다


 덕후임을 자처하고, 무언가의 덕후가 아닌 삶은 좀 슬프지 않나 생각하는 나에게 더쿠는 반가운 친구였다. 물이 무서워도 더쿠만 끌어안고 있으면 얼마든지 물에서 신나게 놀 수 있었다. 바람 불어넣는 사은품 공에 애정이 생겨 "우리 더쿠", "우리 더쿠" 부르며 며칠을 보냈다. 사은품 주제에 돈 주고 사온 미니언즈 공보다 훨씬 짱짱해서 우리 모두 더 예뻐할 수밖에 없었다. 수영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면 산책 후에 반려동물 씻기듯이 우리 몸 닦은 수건으로 물기도 싹 닦아 에어컨 나오는 방 한편에 모셔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셋 다 외출을 준비하는데 더쿠가 안 보이는 게 아닌가. 먼저 올라온 사람은 안 챙겼다 하고, 늦게 올라온 사람은 미리 챙겼는 줄 아는 상황이었다. 이럴 수가, 우리 더쿠는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테라스에서 수영장을 내려다보며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우리 더쿠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신경 쓰지 못한 틈에 더쿠를 탐낸 다른 투숙객이 납치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외출하기 전에 더쿠를 향한 애정을 담아 혹시 모를 수색 작전을 벌였다. 담장 너머도 살펴보고 1층 테라스나 화단도 살폈다. 우리가 누워있던 쪽 선베드 아래와 뒤쪽 구석구석 무릎을 꿇고 들여다봐도 더쿠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더쿠를 잃는 건가 생각하며 돌아서는데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쪽 화단에 노란색이 삐죽 보인다. 더쿠다! 아마도 바람에 떠밀려갔을 더쿠를 기어이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런데 다시 찾은 더쿠는 어디 뾰족한 곳에 찔렸는지 아니면 사은품의 운명이 다했는지 바람이 조금씩 빠지는 게 아닌가. 사랑하는 더쿠를 잃는다는 슬픔에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 들... 진 않았고 속으로 이별 인사 정도를 되뇌었다.


 '우리 더쿠, 잘 가.'

 '그동안 고마웠어.'

 '그리고 누군지 모를 투숙객님,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바람이 빠지는 더쿠를 보며 우리 셋 다 아쉬워했지만 우리가 누군가. 여행을 앞두고 미련하게 하나씩 하나씩 짐을 늘려갔던 게 우리 아닌가. 결국 바람이 빠지는 비치볼을 기어이 챙겨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련해도 어쩌겠나 이런 성정인걸. 귀엽고 예쁜 건 아끼다 똥이 돼도 못 버리고 모으는 덕후들인걸. 치앙마이 한 달 살기는 그렇게 예쁜 쓰레기 수집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안녕, 더쿠







* 'DUCKOO'는 초코사이다라는 콘텐츠 창작 집단의 캐릭터다.(http://www.chokocider.com)


** '덕후'는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줄임말로, 요즘은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네이버 시사상식 사전)


*** '오타쿠'는 어떤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뜻하는데, 70년대 일본에 등장한 신조어. 초기에 부정적 뜻으로 쓰였으나 의미가 점차 확대되면서 특정 분야의 전문가 등을 지칭하는 말로 더 많이 쓰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타쿠 관련 용어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미드 '보스턴 리갈'에서 주인공 데니 크레인이 했던 대사를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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