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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멀스멀 Oct 06. 2019

손톱을 깎으며

여행 전에는 손톱을 깎습니다

 내 손톱 안의 살은 손톱을 타고 올라온다. 그래서 바짝 깎기보다는 조금 길게 유지하는 편이다. 이건 아마도 단단하고 예쁜 손톱을 물려주신 어머니 덕도 한몫하겠다. 손톱을 매일같이 관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이런 특성 때문에 한 달여 만에 한 번 관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련한 사람이라 너무 오래 방치한 손톱이 찢어져 급히 깎기도 하지만 웬만해선 그 정도까지 오래 두진 않는다. 왜냐하면 여행을 앞두고 꼭 하는 일이 손톱 깎기이고, 나는 짧으나 기나 여행을 자주 떠나기 때문이다.


 늦은 6월에 짧은 치앙마이 여행을 앞두고 손톱을 깎았다. 일로, 여행으로 여러 번 다녀온 방콕에는 도대체 정을 붙이지 못했기에 의구심을 가지고 떠난 치앙마이 여행은, 오랜만에 큰 여운을 남겼다. 며칠간 지냈던 숙소와 주변 골목에 정들었고, 매일같이 드나든 골목의 작은 식당 주인어른들이 눈에 밟혔다. 치앙마이에 간다면 당연스럽게 가곤 하는 도이수텝이나 그 흔한 사원 하나 다녀오지 않았지만, 골목들이, 사람들이, 좋아하는지도 몰랐던 꽃과 풀들이 남긴 인상은 짙었다.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짧은 여행을 마치고 우리는 이내 '한 달 살기'라는 이름으로 화자 되는 다음 여행을 -억지로-준비했다.


치앙마이의 골목의 꽃, 담장과 하늘


 당장 떠나고 싶어도 여러 사정상 그럴 수 없었다. 억지로 한 달 살기를 떠나기에 앞서, 다른 여행을 갈 여유 또한 없으니 여행을 앞두지도 않았는데 망연히 손톱을 깎을 날이 아왔다. 어차피 삶이 여행이 아니냐, 떠들고 다니는 주제에, 어디 갈 데 없이 집구석에 앉아 손톱을 자르려니 괜히 슬프고 심술이 볼 멘 소리를 해댔다. 나에게 손톱을 깎는 일이란 여행을 준비하는 일인데, 이게 뭐냐고. 그렇게 어중간한 시점에 손톱 정리를 하고 시간이 흘러 출국날이 다가오자, 지금 깎자니 타고 올라오는 속살 때문에 아플 것인 어중간한 길이의 손톱을 가진 채 다시 치앙마이로 향했다.


치앙마이 지도. 정 사각형의 올드시티가 인상적이다 / 출처 : 구글 지도 캡처


 누군가에겐 생소한 이름일지 몰라도, 치앙마이는 태국 제2의 수도와 같은 대도시다. 가로, 세로 1.6km 길이의 다 무너진 성벽을 둘러싼 해자 안, 시간이 멈춘듯한 올드시티와, 조금 떨어진 변두리 이곳저곳의 최신의 동네가 공존하는 특이한 도시. 두 가지가 뒤죽박죽 섞여버린 많은 곳들과 다르게, 그날 기분에 따라 원하는 것을 따로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랩이니, 푸드판다니 하는 차량 공유와 배달 서비스는 우리보다 잘 돼있어 극강의 편리함을 저렴한 물가로 즐길 수 있어 매력적인 곳이다. 어쨌든 이렇게 다양한 얼굴을 가진 도시다 보니 다시 찾으면서 어디에 머물지가 큰 문제였다. 고작 며칠 머물며 정들었던 골목도 그립지만, 아직 보지 못한 골목이 차고 넘치니 지도를 들여다보며 며칠을 보냈다.


 고민 끝에 올드시티 동쪽 좁은 골목 안의 호스텔로 첫 숙소를 정했다. 첫 보름간 둘이 지낼 숙소였는데, 2인이 함께 쓰는 도미토리는 처음이라 궁금하기도, 내심 걱정되기도 했다. 늦은 밤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가녀린 여자 호스트와 스텝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체크인을 하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의 숙소로 향하는데 기꺼이 우리 둘의 짐을 들어줬다. 무겁다며 거듭 말렸지만 그들은 돕겠다며 팔을 걷어 부쳤고, 이내 생각보다 무거웠던 우리 가방 때문에 힘들어했다. 올라가는 내내 우리는 우리가 들겠다며 실랑이하고 조금이라도 거들며 도착한 공간은 생각보다 훨씬 아늑하고 넓었다. 물론 다음날 우리가 풀어놓은 거대한 짐에 점령당해 빈 틈이라곤 찾을 수 없이 번잡하게 됐지만.


같은 공간이 맞습니다만... 이렇게 되기도 합니다


 들고 오르기 힘들었던 무거운 짐에는 굳이 한 달 사는데 필요할까 싶은 쓰리세븐 손톱깎이 세트가 들어있었다. 자랑스러운 굴지의 손톱깎이 브랜드인 쓰리세븐을 태국 땅에... 는 됐고, 이 세트로 말할 것 같으면, 자크를 열어 펼치면 수술도구처럼 양 옆 도합 10개가 넘는 도구가 나온다. 나를 예뻐해 주시는 선생님께 선물 받은 이 세트는 아주 유용한 것으로 가득 차 보이지만, 사실 손톱깎이를 제외하고는 용도를 알지도 못한다. 그것도 왜 굳이 큰 손톱깎이, 작은 손톱깎이, 비스듬한 손톱깎이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 세트에 대해 다시 말할 것 같으면, 고민 끝에 골라 조심스럽게 무게추처럼 가방에 넣었다 읽지도 않고 도로 갖고 오는 산문집 세 권과 마찬가지로, 손톱깎이 하나를 제외하면 그저 짐이었다. 첫날 짐을 들어주었던 호스트 C는 아마도 '치앙마이에 이렇게 무거운 캐리어를 갖고 온다고?' 싶지 않았을까.


 애매한 길이의 손톱을 가지고 떠나, 이제는 깎아야 할 손톱이 되었을 즈음 귀국할 날이 밝았다. 내버려 두면 찢어질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귀찮고, 여행 막바지에 깎으려니 또 괜히 심술이 나 내버려 두었다. 역시나 미련한 사람의 손톱답게 마지막 날 짐을 정리하다 기어이 찢어지고 말았다. 만사 귀찮고, 짐을 싸 오르는 귀국길도 속상해 속으로 짜증을 내다, 일단 큰 손톱깎이를 기내용 배낭 한편에 밀어 넣었다.


 출국 수속을 하고 면세구역의 조용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손톱을 깎다 보니, 아! 나는 지금 한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길이구나, 그러려고 손톱이 찢어졌나 보다 싶었다. 역시 돌아와 보니 그다지 여행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삶이 여행 아니냐, 또 떠들며 여행하는 척이라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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