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사회에서 진정 사랑할 수 있을까?

by 자치언론 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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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오늘날 사랑의 위기

한때 칼럼 계의 아이돌이라 불리었던 서울대 김영민 교수의 경향신문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되물어라.’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울적함에 유쾌하게 박장대소하고 싶다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린다. 해당 칼럼은 정체성을 따지는 근본적인 질문은 대개 존재의 위기 상황에서 제기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인생의 허무가 느껴질 때야 비로소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 존재로부터 환멸을 느낄 때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국가의 파국적 위기 속에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 교지의 12호 주제로 ‘사랑’이 호명된 것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이번엔 사랑에 대한 글쓰기가 필요하다는 합의 속에 ‘사랑의 위기론’에 대한 다수 부원의 무의식적인 동의가 있었다고 한다면 넘겨짚는 것일까?


사랑의 위기라는 진단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면, 이제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통해 우리에게 절실한 사랑을 위기 속에서 건져내기 위한 투쟁을 벌일 차례다. 이를 위해 10년 전, 사랑의 위기를 진단하고 우리에게 경고한 철학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바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다. 한병철은 『피로사회』를 통해 이미 국내 인문학계에도 익히 소개된 인물이다. 그는 저작 『에로스의 종말』에서 오늘날 사랑의 위기는 사회 전체가 동일성의 논리로 재편되며 타자성의 가능성을 상실한 데 따른 결과라고 본다.












2. 본론


(1) 사랑이란 무엇인가

한병철은 사랑의 본질이 타자를 향한 자기 해체라고 주장한다. ‘나’와 다르며, 결코 ‘나’의 세계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존재인 ‘아토포스(atopos)적* 타자’는 사랑이라는 사건을 통해 ‘나’의 자기 중심성을 깨뜨리고 새로운 존재 방식을 가능케 한다. 아토포스적 타자성의 개념은 ‘헤테로토피아적 차이’와 병치시켜 비교하면 더욱 명확해진다. 먼저 헤테로토피아적 차이란 표면적 차이이자 통제가능한 다름이다. 이는 주체가 안전하게 소비하고 수용할 수 있는 범주의 것으로서 동일성의 관리 가능한 확장일 뿐이다. 이러한 다름은 사회구조에 그 어떤 균열도 내지 않은 채 체제 안으로 안전하게 흡수된다. 반면 아토포스적 타자성은 현재 나의 사유, 언어, 인식 틀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는 계산 불가능한 이질성으로 나의 상식과 정체성을 위협한다. 사랑은 이러한 아토포스적 타자를 받아들이기 위한 자기 비움과 자기 해체의 과정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실패와 고통, 상처를 감수하는 용기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 사랑은 상대의 이질성과 낯섦을 감수하는 고통스러운 개방이다.


*아토포스(atopos): 직역하면 ‘자리가 없는’, ‘제자리를 벗어난’을 뜻

하는 그리스어. ‘분류되지 않는 것’, ‘설명 불가능한 것’을 의미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문학과지성사, 2012.


(2) 오늘날의 성과사회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오늘날 사회가 ‘규율사회’를 넘어 ‘성과사회’에 도래했다고 주장한다. 규율사회는 “해서는 안된다”라는 부정성의 명령으로 작동하는 사회이다. 이는 18~20세기에 이루어진 산업화 및 근대국가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는 일정한 시간표와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통제 가능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공장은 규율의 핵심 공간이었고, 군대·학교·병원도 유사한 방식으로 개인을 규격화했다. 규율사회는 개인을 ‘순종적이고 유용한 신체’로 만드는 통치 장치들의 집합으로, 외부 권위의

강제와 금지로 주체를 통제하였다. 이러한 사회에서 ‘강제하는 자’와 ‘저항하는 자’는 분리되어 있었으며, 규율과 금지에 저항하는 자에게는 해고, 처벌과 같은 물리적 처벌이 가해졌다. 이후 20세기 후반, 후기 자본주의에 접어들면서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경제구조가 제조업에서 서비스·정보·지식 산업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노동자를 규율로 통제하는 것보다 개인의 창의성·자율성·유연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 더 많은 효율을 산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외부 강제에서 자기 통제로 명령의 형식이 전환되면서 성과사회는 규율사회보다 훨씬 정교하고 효과적인 통제 양식을 확립하게 된다. 2


한병철,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2015.


새롭게 도래한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라는 긍정성의 조동사로 작동한다. 자기 경영, 자기 확신의 율법이 관장하는 이 사회의 시민은 더 이상 외부 명령에 단순 복종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경영하는 기업가이며 이를 위해 자기 자신에게 끝없이 명령을 내리는 성과 주체다. 성과사회는 외부 권력의 강제가 아니라 내면의 자기강제를 통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통제한다. 금지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가능해진 듯 보이지만, 이 긍정성의 과잉이 곧 새로운 억압으로 전환된다. “할 수 있다”는 명령은 곧 “해야만 한다”는 압력

으로 변하며, 이 압력은 외부의 강제보다 더 은밀하고 강력하다. 규율사회에서 주체의 외부에 존재했던 ‘강제하는 자’가 내면화되면서, ‘강제하는 자’와 ‘저항하는 자’가 동일한 주체 안에서 겹쳐진다. 따라서 주체는 자신에게 성과를 요구하고 그에 응답해야 하는 이중적이며 분열적 위치에 놓인다. 억압과 저항의 대립 구도가 불명확해진 성과사회에서 저항은 자기 부정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저항은 불가능하거나 자기 파괴적으로 나타난다. 규율사회에서 외부 명령에 저항하는 주체는 감금, 구타, 처벌 같은 물리적 고통을 겪는 반면, 성과사회에서의 저항은 자기 부정성으로 귀결되기에 성과 주체는 우울, 번아웃 같은 신경학적 고통을 겪는다.


(3) 성과사회에서 사랑은 왜 불가능한가

사랑은 주체가 타자에게 도달하기 위해 자기 해체를 감수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이는 성과 주체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 해체는 성과사회에서 요구되는 끊임없는 자기강화, 자기 확신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사랑의 부재는 개인의 감정·도덕적 결여로 설명될 수 없으며, 성과사회 내 구조적 불가능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성과사회는 효율성을 위해 모든 것을 동일화하기에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성과를 판단하려면 비교가 가능해야하고, 비교는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 이는 시장이 상품의 효율적인 교환을 위해 가치를 정량화하고 모든 것을 동일한 단위로 환산하는 것과 유사하다. 고유한 것, 다르게 생긴 것, 측정할 수 없는 것은 성과나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타자성은 비교 불가능한 것, 측정 불가능한 이질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타자성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방해하는 것으로 치부되어 구조적으로 배제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조악한 예를 하나 들고자 한다. 아래는 어린 시절 즐겨 불렀을 동요 <우산>의 가사이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란 우산 검정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학교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 대고 걸어갑니다


성과사회의 관점에서, 파란 우산과 검정 우산은 색깔은 다르지만 비를 막아주는 우산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이들의 ‘색깔’ 차이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찢어진 우산의 경우, 우산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성과사회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존재이다. 그것을 우산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우산을 재정의하는 과정이 요구되는데, 이는 체제 전복적이다. 이 ‘찢어진 우산’의 존재는 ‘우산’계가 구성해온 ‘우산’의 정의와 질서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우산이 상품으로서 반드시 그 기능을 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구조적으로 배제-즉, 쓰레기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우산의 경우 태생부터 도구로서 발명된 것이기에, 존재 자체로 내재적 가치를 지닌 인간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결론: 사랑은 어떻게 혁명의 단초가 되는가

한병철은 구조적 불가능성에 기인한 오늘날 사랑의 위기는 사랑과 정치를 결합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정치란 권력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정의를 초과하여, 기존 질서가 당연시해 온 규범을 흔들고 낯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장(場)을 마련하는 행위를 말한다. ‘아토포스적 타자’를 받아들이는 행위로서 사랑과 그를 수용하기 위해 공간을 재구성하는 행위로서 정치가 결합할 때, 사랑은 구조를 전복하는 힘이 된다. 다시 말해, 사랑과 정치의 결합은 ‘찢어진 우산’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산’을 재정의하는 것과 같다. ‘찢어진 우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산’을 재정의하는 것이 정치이다. 이렇게 사랑과 정치의 결합은 필연적으로 규범의 해체 및 재구성을 요구하기에 기존 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힘으로서, 혁명의 단초가 된다.


오늘날 사랑을 위기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방법으로 혁명-곧 성과사회 너머로의 이행-을 제시하는 한병철의 주장은 다분히 급진적이고, 그렇기에 절망적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혁명을 이루기 전까지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혁명이라는 부담스러운 규획과 사랑의 종말이라는 피하고 싶은 결말 사이, ‘한병철’적 이분법 앞에서 결단을 요구받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필자에게 해답을 요구하지는 말아주시길. 그러나 이 긴 글을 읽어준 독자에게 질문만 던지고 사라질 수는 없으니, 어쭙잖은 의견 하나를 덧붙인다. 다음은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전한 일화를 필자가 조금 각색한 것이다.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는 것과 노모를 부양하는 것 중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한 젊은이에게 사르트르는 이렇게 답했다. “선택은 자유이다. 네가 선택하고 그에 책임져라.” 일화를 소개한 지젝은 이를 뒤집으며 자신의 답을 말한다. “어머니에게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해야 한다고 하라. 레지스탕스에 가서는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고 하라. 그리고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라”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으며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뜻일까? 일화 속 젊은이와 비교하면 우리는 둘 다 피하고 싶은 선택지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혁명과 사랑의 종말 중 당장 결단을 내리라는 부담스러운 요구로부터 잠시 빠져나와 도서관으로 도피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지젝의 답변은 일부 반갑게 느껴진다. 도서관으로 도피해서 책을 읽고, 공부하자. 지구는 둥글기에, 결정의 무대로부터 도피하여 하염없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어느 순간 점점 더 가까워질 것이다. 책 속으로 도피하여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운명의 갈림길을 마주한다면, 그때는 결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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