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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Nov 20. 2022

양심의 무기

-대나무와 매화에 깃든 양심


화살촉이 된 댓잎     


대나무는 고려시대부터 그렸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맞이한다.

대나무에 붙은 상징이 조선 유학자들의 철학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

흔히 대나무는 바람에 흔들려도 좀처럼 꺾이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양심을 지키는 군자의 모습에 투영한 것이다.

대나무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었기에, 선비들은 대나무를 그리고 감상하면서 인격을 수양했다.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 세종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으로 임진왜란 때 팔이 끊어질 뻔한 부상을 당한다.

이후 이정의 그림은 확실히 달라졌다.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는 단단해지고 잎은 화살촉처럼 날카로워진 것이다.         

[이정/풍죽(風竹)/비단에 수묵/127.5*71.5/17세기 초/간송미술관 소장.

대나무 잎을 마치 화살촉처럼 날카롭게 그렸다.]

     

일본은 전국을 통일한 후 비대해진 군사력을 밖으로 해소하기 위해 정명가도(征明假道)라는 허망한 논리와 얄팍한 복수심을 내세워 조선을 침략한다.

이 때문에 조선 땅은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육 당했다.    

  

조선은 평화를 중심으로 외교정책과 민본정치를 추구했던 나라였다.

조선 왕실이나 선비들은 왜국의 침략에 대해 극도로 분노했고 짐승의 행위로 규정했다.

또한 이런 침략자들에게 나약하게 무너질 뻔했던 조선에 대해서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러한 성찰은 그대로 대나무 그림에 투영된다.

이정의 그림 속 대나무는 거센 바람을 맞아 흔들리고 있다.

대나무를 흔드는 것은 왜국의 침략과 살육이다.

하지만 왜국의 침략을 막아내었듯이 대나무는 꺾이지 않는다.      


대나무 잎은 마치 화살촉처럼 날카롭다.

거센 바람에 꺾이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침략자를 무찌르는 강력한 무기가 된 것이다.

스스로에게는 나약함을 다스리는 송곳 역할을 한다.


대나무 잎을 화살촉처럼 그리는 일은 쉽지 않다.

댓잎은 식물이고 화살촉은 인공적으로 가공한 쇠붙이이다. 식물과 무기를 결합하는 일은 정서에도 맞지 않다.     

 

그럼에도 이런 결합을 이루어낸 것은 대나무가 양심의 상징이고, 화살촉은 침략자를 물리치는  양심의 행동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왜국의 주력무기였던 칼과 조총에 대항하는 조선의 주력무기가 활과 화살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창이 된 매화가지     


어몽룡(魚夢龍-약 1566~1617)은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이다.

매화그림으로는 조선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매화는 양심의 상징이다.

매화는 바람이 부는 이른 봄에 꽃을 피운다.

이런 특성을 어려움 속에서도 양심을 밝히는 군자의 모습에 비유했다.

    

어몽룡의 [월매, 月梅]라는 그림은 둥근 달이 떠 있는 깊은 밤에 고고하게 서 있는 매화를 그렸다.

우리그림에서 둥근 달은 현실의 어려움이나 고난을 뜻한다.

이정의 그림에서 대나무를 흔드는 바람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몽룡(魚夢龍)/월매도(月梅圖)/비단에 수묵 119.4×53.6cm/17세기 초/국립중앙박물관. 둥근 달은 세상의 어려움을 뜻한다. 매화는 어려움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양심을 상징한다. 매화 가지를 마치 창처럼 뾰족하게 그려 강력한 의지를 표현했다.]     


그런데 어몽룡의 매화는 일반적인 모양이 아니다.

보통 매화가지는 위에서 아래로 늘어지는데, 어몽룡은 반대로 하늘로 솟구친다.

마치 창처럼 곧게 뻗고 그 끝은 바늘처럼 날카롭다.    

그림 속 매화나무의 큰 가지는 부러져있다. 부러진 가지에서 날카롭게 생긴 새로운 가지가 나오고 꽃이 피어있다.


이 작품은 실제 매화나무를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화가가 이런 표현을 하게 된 동기는 임진왜란과 무관하지 않다.      


부러진 매화 가지는 전쟁의 상처이다.

창처럼 날카롭게 자란 가지는 양심의 힘이고 매화는 양심을 꽃피우는 것이다.

이 작품은 명분 없는 전쟁과 살육을 동반한 침략에 대한 강한 대응과 무너지지 않는 양심의 힘을 표현하고 있다.


어몽룡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임진왜란을 겪었다.

사회적 활동이 가장 왕성할 때 전쟁의 참사를 마주하여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이러한 비통한 심정을 매화그림을 통해 달래고 삶에 대해 새로운 꿈을 가지려 한 것이다.      


어몽룡의 매화그림은 탄탄한 이성을 바탕으로 감정을 극대화하여 표현했다.

이성은 전쟁과 살육을 반대하는 양심이며, 감정은 날카로운 매화가지이다.      


세밀하게 그렸거나 수려한 채색을 했다고 명작(名作)이 되지는 않는다.

손재주가 좋고 탁월한 기법을 사용해도 쓰레기로 취급하는 그림도 많다.      

미술작품은 그냥 느끼거나 각자 알아서 해석하는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공공의 영역이다.


따라서 작품에는 화가의 철학이 시대의 흐름에 맞아야 하며, 무엇보다 사람들의 양심에 맞는 인문학적 내용이 정확히 들어가 있어야 한다.           

이정의 대나무그림과 어몽룡의 월매도(月梅圖)는 5만 원 권 지폐의 뒷면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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