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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Dec 16. 2022

그림의 나라, 조선

세화(歲畵)

세화는 화원에게 각기 화초, 인물, 누각을 그리게 한다. 예조에서는 그림을 상하 등급으로 매겨 궁궐에 걸거나 재상과 신하들에게 하사한다.---중종실록 5(1510)  

   

세화는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이 각 30, 도화서 화원이 각 20장을 1220일까지 그려 올려야 한다.---(육전조례, 六典條例)      

[십장생도는 세화의 단골그림이다. 비단에 그려 병풍으로 만든 십장생도는 주로 왕실 친인척이나 고위 관료들에게 하사했다. 세화는 대부분 채색화였으며 속화(俗畫)라고 했다.]     


“세화가 도대체 뭔가?”   

  

“왕이 정초에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미술작품일세. 대비나 대원군, 왕비, 후궁과 같은 왕실사람들도 포함되지.

기록에는 고려 말부터 세화가 있었다고 하네.

세화는 그 말처럼 매년 그려서 하사하는 그림인데, 조선 초기부터 관례가 되었다네.

이 관례는 20세기 초반, 조선이 망하기 직전까지 이어지지.”

    

“왕이 직접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 많은 그림은 누가 그린 것인가?”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서와 자비대령화원에 속한 화원들이 주축이 되어 그렸네. 서울, 경기지역에 사용할 그림은 도화서에서 그렸고, 팔도지역은 각 관청에 소속된 지방 화원이 그렸다고 하네.

세화 제작 기간은 대략 2~3개월 정도였네. 12월 20일까지 완료하기 위해 화원들은 매일 야근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네. 세화 제작이 끝나야 한 해 업무가 마감된다고 여길 정도였네.”

    

“왕실과 수많은 신하들에게 그림을 하사하려면 꽤 많은 그림이 필요할 텐데?”

    

“중종 이전에는 매년 60여장 제작되었는데, 중종 연간에는 갑자기 수 백 장으로 많아졌지.

1537년 당시 도화서의 인적 구성은 제조(提調) 1명, 별제(別提) 2명이 있었고 정화원 20명, 이외에 화학생도(畵學生徒) 15명, 배첩장(褙貼匠) 2명이 속해 있었네.

이 가운데 직접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는 화원은 20명이지.

단순하게 계산해보면, 화원 20명이 1인당 20장씩 그려, 모두 400장에 이르는 세화를 매년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네.      

조선 후기에 들어 세화는 더욱 많이 그려진다네.

영조 때 만든 자비대령화원은 정조에 이르러 확대된다네.

당시 자비대령화원 10인이 1인당 30장씩 그려 300장이고, 도화서 화원 20인이 1인당 20장씩 그렸으므로 400장이 되지. 매년 700여 장의 세화를 그린 셈이지.

지방 관청에서  그린 작품을 포함하면 매년 1000점 이상일 것이네.

     

“매년 빠지지 않고 그린 것인가?”

     

“세화제작에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네. 요즘 환율로 계산하면 수 백 억일세. 그래서 나라가 어려울 때는 세화제작에 반대하는 신하가 많았지.

전쟁이 나거나 왕이 죽었을 때, 가뭄이나 역병이 심할 때는 세화를 그리지 않았다고 하네.”


“주로 어떤 작품을 그렸는가?”

    

“거의 모든 갈래의 그림을 그렸네.

십장생도, 해학반도도와 같은 병풍그림부터 산수화, 신선도, 화조도, 영모화(개, 닭, 독수리, 고양이 따위의 동물그림), 용, 해태와 같은 서수도(瑞獸圖) 따위를 모두 포함했지.

어떤 학자들은 복을 주는 신선도나 액막이를 하는 개, 닭, 독수리, 용, 해태 같은 그림이 주류라고 하지만 단편적인 주장일 뿐이네. 당대에 유행하거나 필요한 가치를 담은 그림을 중심으로 매년 바뀌었네.”

     

“잘 알겠네. 이 정도의 지식은 인터넷을 검색하면 쉽게 알 수 있지. 뭐,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것인가?”

     

“혹시 그림으로 정치를 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조선은 세화로 정치를 한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였네.”     


“오호, 이제야 구미가 당기는구먼. 자세히 말해 보게.”  

   

“조선은 500여 년 간 동안 존재했네. 단일 왕조로는 세계 최장 국가였다네.

도화서 화원이나 자비대령화원은 조선 최고의 화가들이고 작품의 수준도 가장 높았지.

정말 겸손하고 보수적으로 계산해 보겠네.

매년 평균 500여 장을 그렸다고 가정하면 500여 년 동안 25만 장 정도가 창작되었네.

전쟁이나 왕의 사망, 역병 때문에 세화를 그리지 않은 시기를 감안하더라도 최소 20만 장 정도는 그렸을 것이네. 20만장은 실로 엄청난 양의 그림일세.”    

 

“조선시대 관직은 2000개 정도라는 말이 있더군. 이 정도의 양이면 조선팔도의 모든 관리가 세화를 하사받았겠구먼.”  

        

[단원 김홍도의 군선도. 조선에서는 중국의 신선을 군자의 상징으로 수용했다. 탐욕을 버리고 백성을 도우는 신선의 풍모는 군자와 같았기 때문이다. 세화는 양심의 내용을 담은 정치적인 그림으로 쉬우면서도 대중의 정서를 자극하는 그림이 많았다.]


“모든 관료는 최소 4년 한 번 정도는 세화를 하사 받았네. 고위 관료의 경우에는 매년 1~2점 정도의 작품을 받기도 했네.

미술작품은 쓰고 버리는 생활물품이 아니지.

천재지변에 의한 훼손이 아니라면 미술작품의 보존기간은 최소 10년이 넘는다네. 비단에 그리고 병풍으로 만든 것은 30년을 훌쩍 넘기지.

따라서 고위직부터 하급 관리의 집에는 그림으로 넘쳐났을 것일세.     

관료들이 집안에 그림을 걸자, 백성들도 이를 따라했네. 지물포나 장마당에서 값싼 그림을 구매해 집안을 장식했지.

궁궐부터 백성의 초가집까지 그림으로 넘쳐났네. 그야말로 그림의 나라가 된 것이지.”

    

“서양 귀족이 사는 성에 많은 그림이 걸린 것을 본 적이 있네. 조선에서는 하급관료는 물론 백성의 초가집까지 그림을 걸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군.”


“서양의 경우는 개인 비용을 들여 구매한 것이네. 이에 반해 조선은 공짜로 나눠주었지.

백성들이 장마당에서 구매한 그림도 아주 저렴했지. 집에 걸어두었다가 훼손되면 불쏘시개로 사용했고, 멀쩡한 그림을 버리고 정초에 다시 구매해 붙였다네. 마을의 부자나 어르신들은 정초에 많은 그림을 구매해서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지.     

아무튼, 전 세계에서 국가가 주도하여 엄청난 양의 그림을 제작하고 유통시킨 나라는 조선 밖에 없네.”         

[정홍래/욱일취도. 숙종 연간 정홍래의 매 그림이 세화로 선정되었다고 기록한다. 매는 군자, 아침 해는 양심, 괴석은 변치 않음, 파도는 어려움의 상징이다. 이를 모두 결합하면, 어려움 속에서도 변치 않는 양심을 추구하는 군자를 뜻한다.

화원이 창안한 그림이 세화에 선정되는 경우도 많았다. 정홍래는 이 매 그림을 최소 20점 이상 그렸다. 그림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랐다.]    

 

“매년 수 백 억을 써가며 그림을 뿌린 진짜 이유가 뭔가?”
     

“국가에서 집안을 꾸미라고 비싼 그림을 준 것은 아니네. 그림을 창작하고 감상하는 것 자체가 정치의 방편이었네.

정치라는 것이 뭔가? 국가의 존립가치나 통치철학을 만백성과 함께 공유하는 것일세.      

조선은 성리학이라고 하는 철학으로 건국하고 500여 년 간 발전한 나라였네. 성리학의 핵심 내용은 양심과 민본정치라네. 무력과 돈이 아닌 양심으로 나라를 통치한 것이지. 그런데 사람은 욕망의 존재라네. 탐욕, 이기심과 같은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양심을 키워야했지.

그림은 양심을 교화하고 키우는데 더없이 훌륭한 수단이었네.”  

   

“양심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최고가 아닌가? 차라리 향교, 서원, 서당 같은 학교를 세워서 가르치는 것이 더 나았을 것 같은데?”

    

“그림은 어떤 교육보다 뛰어난 효과를 발휘하네.

사람은 외부 정보의 7~80%를 시각에 의존해 수용한다네. 그림은 전형적인 시각예술로 철학, 역사, 사람, 현상, 사물 따위의 광범위한 정보를 담고 있네.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와 꿈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지.

그래서 그림은 주술, 숭배의 특성을 가지고 있네.

원시 동굴벽화, 고분벽화, 종교화를 떠올리면 쉬울 것이네. 여전히 사람들은 그림에 절을 하고 소원을 빈다네.

그림은 언제나 지배층의 전유물이었지.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한다네. 그림을 움켜쥔다는 것은 사람을 다스리고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것과 같았지.

현대인의 가치관과 정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미디어이네. 미디어의 대부분은 그림으로 이루어졌네. 동영상도 결국은 그림 한 장 한 장을 연결한 것이지.”    

[꽃과 새를 그린 화조도는 세화의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이다. 양심의 내용을 담으면서도 장식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화조도는 주로 남자의 사랑방을 장식했다. 이후 양심을 통해 욕망의 구현이라는 내용을 추가되면서 여성의 영역까지 확대한다. 엄청난 양의 세화가 민간에 뿌려지면서 민화를 유행시켰다.]     


“정부에서 그림을 하사한 것도 결국 미디어를 통한 교육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네. 당시는 사진이나 동영상 기술은 없었네.

국가나 지배층들은 그림이나 미디어를 독점하고 통제하려고 하지. 그런데 조선 정부는 그림을 독점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마구 뿌렸다네.”

    

“아하, 그래서 민화와 같은 대중미술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나라라고 하는군. 미국의 팝아트보다 수백 년을 앞섰다고 하지.”  

   

“조선시대의 보물은 금은보화나 공예품이 아닐세.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록물과 미술작품이라네.”

     

“어떤 사람들은 책만 읽고 당쟁만 일삼은 유학과 선비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고 하던데. 그림 같은 철학놀이 보다는 상업과 군사력 같은 실학을 발전시켜야 백성이 잘 살지 않겠는가?”   

  

“유학은 처음부터 실학이었네. 전쟁과 살육, 약탈을 막고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방편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나왔네.

조금 어려운 말이지만, 그림은 철학의 시공간을 창조한다네. 사람이 인식하는 세계는 결국 당대 철학이 창조한 세계일뿐이네.

자본이 만들어낸 세상에 사는 사람과 양심이 창조한 세계에 사는 사람은 가치관이 달라질 수밖에 없네.

시장경제와 나라를 지킬만한 군사력은 반드시 필요하네.

하지만 양심이 없는 자본과 군사력은 필히 불평등과 전쟁이라는 지옥을 만들어내지.”  

   

“사람들은 조선이 그림으로 양심의 정치를 하고, 그림의 나라인 것을 잘 모르네. 이유가 뭔가?”    

 

“복잡한 이유가 있네.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일세.”    

 

“두려움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군.”   

  

세화에는 우주적 본성으로 강력하고 무자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양심과 이를 통한 태평성대가 표현되어 있다네. 이를 가장 겁내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누구겠는가?”   

  

양심있는 세상이 무서운 사람, 모든 백성이 잘사는 나라가 싫은 사람, 그야... 나쁜 놈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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