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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Feb 28. 2023

너무 일찍 죽는 임금

왕의 역할 

 “조선왕조실록에는 역대 임금들의 생몰연대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고 하네. 

이를 근거로, 평균 수명을 따져보니 44세 전후였다지.”   

  

“영조 임금의 경우는 80세 이상 장수했는데, 나머지 왕들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지. 개혁 군주로 알려진 정조 임금의 경우 48세에 갑자기 죽어서 망국적 세도정치를 불러왔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이네.”  

   

“조선 시대 백성들의 평균 수명을 40세 전후라고 하던데, 임금들이 더 오래 산 것이 아닌가?”    

 

“평균을 산출하는 기준에 따라 다르네. 

예를 들면, 한 사람은 80세, 한 사람은 2살 때 사망했다면 평균 수명은 40세가 된다네. 예전에는 영아 사망률이 높았네. 그래서 돌잔치를 열어줄 정도였지. 일단 5세 정도만 넘기면 6~70세를 사는 것은 별문제가 없었네.

아무튼,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삼으면 조선 시대 백성들의 평균 수명은 60세 전후라고 추정한다네.”


“좋은 음식과 조선 최고 의사들의 관리를 받았던 왕이 백성들보다 수명보다 짧은 이유가 뭔가?”    

 

“결론을 미리 말하면, 엄청난 공부와 일 때문에 과로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세. 왕들은 눈병, 종기, 중풍과 같은 만성질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일찍 떠났지.” 

    

“왕이 주색잡기에 허우적거리다 기가 빨려 일찍 죽었다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네. 명색이 왕이 아닌가. 쉬고 싶으면 쉬고, 놀고 싶으면 놀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임금이 평생 일만 하다 죽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는군.”


“신하들이 임금을 엄청나게 갈궜다네. 항상 감시하면서 조금이라고 나태하면,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선왕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왕의 풍모를 지키옵소서. 차라리 죽여주시옵소서.’ 라며 협박했다네.”    

 

“에이, 농담이지? 감히 왕을 협박하다니.”    

 

“농담이 아니네. 놀기를 좋아하여 업무를 게을리 했던 연산군을 끌어내려 죽여 버릴 정도로 무자비했네.” 


“후덜덜.”     


“이것도 모자라, 왕이 업무에만 충실하도록 주변 환경을 치밀하게 바꾸어 놓았지.

왕이 쓰는 모자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는가?”   

  

“왕관이지. 조선 임금이 쓰는 모자를 익선관(翊善冠)이라고 하지 않는가?”  

  

[업무용 왕관인 익선관이다. 뒤쪽 두 개의 뿔이 매미 날개를 닮았다는 속설이 있다.]     


“그렇다네. 왕이 업무를 볼 때 쓰는 모자이네.

익선관은 조선 초기부터 고종 때까지 모든 임금이 사용했지.

전 세계 모든 왕관이 그렇듯이, 익선관은 왕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는 표징일세.

그런데 익선관은 금은보화로 만들거나 장식하지 않았네. 그냥 천과 비단으로 만들었지.

천 쪼가리 모자를 쓰고 왕의 위엄이 서겠는가? 익선관의 진짜 권위는 금은보화에 있지 않다는 말이지.”   

  

“금은보화가 달린 왕관이 아니라면, 그 모양에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일단, 왕관의 명칭이 중요하네. 익선(翊善)은 고려 때부터 사용하던 관직명으로 왕세손의 교육을 맡아보던 종4품 벼슬일세. 세종 때부터 좌익선, 우익선 2명을 두었는데 관직의 역할은 왕세손이 훌륭한 왕이 되도록 교육하고 돕는 것이지.     

익선은 선을 돕고 보좌한다는 뜻이네.

왕이 쓰는 익선관의 핵심 내용은 선(善)에 있는데, 선은 올바른 가치를 뜻하며, 왕과 같은 정치인에게는 위민(爲民)일세.

익선관을 쓰는 자는 임금이니, 임금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권위와 위엄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네.”  

   

“어떤 사람은 익선관(翊善冠) 뒤쪽에 달린 뿔이 매미 날개를 닮았다고 하던데? 얼핏 보면, 매미가 거꾸로 매달린 느낌이더군.”


“익선관(翊善冠)의 앞 글자를 바꿔 매미를 뜻하는 익선관(翼善冠)으로 달리 부르기도 하지. 

왕의 모자를 매미 날개로 규정해도 내용은 바뀌지 않네. 

우리 그림에서 매미의 상징은 군자이며, 군자는 인격의 완성체를 뜻한다네. 

군자는 곧 임금이기도 했지. 군자가 선(善)을 행하는 것처럼 왕이 위민하는 것은 당연하다네.” 

[곤룡포는 왕의 업무복이다. 가슴과 어깨에는 용을 새겨 넣었다. 용은 올바른 정치를 상징인데, 곤룡포를 입으면 마치 임금이 용에게 잡혀있는 모습이 된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오로지 업무에만 집중하라는 의미이다.] 


“왕이 입은 업무용 정복을 곤룡포(衮龍袍)라고 하지. 

여기에도 임금을 다그치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네.     

용(龍)은 왕의 상징으로 용안, 앉는 의자는 용상이라고 불렀다네.” 


“용을 새긴 것은 왕이 신령한 존재라는 뜻이 아닌가?”     

    

“왕을 신령한 존재라고 여긴 적은 없었네. 

왕만 독점적으로 사용한 것도 아닐세. 왕과 별 관계가 없는 건물이나 가구를 장식하고 민화로 그리기도 했다네.

용의 상징은 치수(治水)이라네. 

왕이 기우제를 지낼 때 용 그림을 걸었다는 기록도 있지.

아무튼, 예전에는 물을 잘 다스리는 것이 곧 정치였다네. 

따라서 용은 올바른 정치를 뜻했고, 조선에서 올바른 정치는 곧 민본정치를 뜻한다네.

곤룡포를 입는다는 것은 민본정치를 하는 사람, 혹은 역할이라는 의미이자, 백성들을 위해 죽도록 일하라는 무언의 압력일세.

곤룡포는 왕을 멋있게 보이는 하는 화려한 옷이 아니라, 정치적 족쇄와 같았지.” 

    

“옷이나 모자 말고 또 뭐가 있는가?”  

[오봉도/심규섭/디지털그림. 오봉도는 왕의 독점 상징이다. 해와 산과 소나무, 호수, 폭포 따위를 가지고 왕의 권위가 생기지 않는다. 오봉도는 민본정치를 통한 태평성대를 구현하는 사람, 역할을 의미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용상의 뒤편을 장식한 오봉도(五峰圖)라네. 

알다시피, 오봉도는 태평성대를 구현하기 위해 뼈 빠지게 일을 하는 임금의 역할을 뜻하네.

오봉도는 정말 징글징글한 그림이었지. 왕이 업무를 보는 근정전을 비롯해, 출장을 나간 곳에는 항상 오봉도를 펼쳐놓았다네. 그뿐만이 아니네. 정복을 벗고 쉬는 곳이나 잠자리에도 오봉도를 놓았다네. 

왕이 오봉도를 벗어나는 길은 없었네.”  


“왕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도 오봉도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네.”


“왕은 죽어서도 후대를 위해 일을 했지. 죽은 왕까지 부려먹는 악질 그림이라네.”       

 

“그러니까, 임금은 악을 쓰며 일하는 매미의 익선관을 쓰고, 올바른 정치를 하지 않으면 죽일 듯이 무서운 표정의 곤룡포를 입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오봉도 앞에서 오로지 일만 해야 하는 불쌍한 사람이었다는 말인가.

이렇게 힘든 왕을 왜 하려고 했는가?”  

   

“세뇌를 당한 것이네. 

어릴 적 왕세자로 책봉되면 조선에서 가장 똑똑한 학자들에게 엄격한 군왕교육을 받았지. 학자들은 왕세자에게 ‘임금은 죽을 때까지 백성을 위해 일해야 한다. 그것이 숙명이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역사가 단죄할 것이다.’ 라며 끊임없이 주입했다네.”    

 

“아, 조선의 임금은 극한직업일세. 나는 그냥 평민으로 장수하며 살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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