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픔이 어디까지

by 서원

병동 스테이션에 앉아 있었다. 키가 큰 젊은 환자가 허리를 살짝 굽힌 채 천천히 걸어왔다. 위암이 복막까지 전이된 상태인데 통증 조절이 잘 되지 않아서 3주째 입원 중이었다.

"교수님, 오늘따라 배가 더 아프네요. 어떡하죠?"

마약성 진통제 용량을 늘려가면서 이제는 입원 초기에 쓰던 진통제 용량에 비하면 거의 3배가 되었지만 환자는 여전히 아파했다. 어떤 날은 좀 덜 아픈가 싶다가도 결국에는 다시 아프다고 했다. 암세포들이 주변 조직을 침범해서 아프고, 복막 전이로 인해 장의 움직임이 많이 떨어져서 아팠다.

음식을 먹으면 배가 더 아프고 토하니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미음만 조금씩 먹는 정도였다. 몸도 마음도 아플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 '암'때문이었다. 간단히 생각하면 진통제 용량을 더 빠르게 늘리면 되지만 이 환자의 경우 이미 진통제 용량이 꽤 높았다. 지금 진통제를 빨리 늘리면 어지럽거나 메슥거리는 증상이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

암이 복막 여기저기에 퍼져 있어 아픈 것이니 진통제 용량을 서서히 더 늘리고 다른 계열의 진통제도 추가로 써볼 테니 견뎌보자고. 지난주에 항암제를 맞았으니 반응을 좀 기다려보자고. 환자에게 대답은 했지만 나의 말이 위로도 정보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소파에 앉았다. 마음이 지친 상태라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꺼냈다. 몇 개의 시를 읽다가 이 시를 발견했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낮에 본 그 환자가 생각났다.



눈을 감고

나태주


아픔이 어디만큼

왔는지 본다


손끝으로 왔다가

팔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지나서

머리까지 온다

이제는 제집인 양

온몸을 휘젓고 다닌다


그래도 나는 좋은 일을 생각한다

예쁜 아이 얼굴을 떠올리고

내게 남겨진 날들을 챙겨본다

아픔이 조금씩 꼬리를 내린다

이제 가려는가


하지만 아픔은 이내

다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눈을 감고 아픔이

어디까지 갔는지 본다



암 때문에 아파서 하루에 진통제를 대여섯 번 맞는 환자의 고통을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전날 환자가 맞은 진통제의 총량(기본 진통제 + 아플 때 따로 요청해서 맞은 속효성 진통제)을 고려해서 다음날 환자에게 투여할 진통제의 용량을 정할 뿐이다. 그 과정에 내가 집중하는 것은 '숫자'이다. 진통제의 '용량'과 진통제의 '횟수'.

이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숫자 뒤에 가려져있던 환자의 모습이 어렴풋하게나마 그려지는 듯했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크게 번져나가며 결국 온몸을 휘젓는 그 고통의 느낌을. 어쩌면 환자는 애간장이 끊어지는듯한 통증을 느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다른 생각도 해보고 다른 행동도 해보며 통증을 견뎌보려고 했겠지. 통증이 사그라들고 나면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 뒤면 고통이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공포가 그 나머지 시간을 채우겠지.


눈을 감고 환자의 아픔이 어떠했을지 본다.


keyword
이전 18화그녀와의 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