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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Nov 17. 2020

'당신에게 2', 어느 방관자에게 보내는 편지.

수치심을 알길 바라며.

  안녕하세요.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요. 미리 밝혀두지만 절절한 사모곡(思母曲)은 결코 없을 겁니다. 애증의 칼날이 심장을 찌를지도 몰라요. 지금부터 제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아팠는지 말하려고 하니까요. 잘 들어주세요.


 어느 순간부터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하고 저를 낳은 당신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습니다. 선택권이 없이 태어나 많이 아팠으니까요.(당신과 그는 선택권이 있었지만요.) 그와 동시에 당신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한겨울에 당신을 보려고 유치원 선생님한테 거짓말 치고 집으로 혼자 걸어갔을 정도죠. 물론 당신이 회사에 가고 없어서 밖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몇 시간 뒤에 다시 유치원으로 되돌아갔지만요. 위압적인 그와 달리 다정다감하고 따스한 모습이 좋았어요. 사랑받는 거 같았거든요. 일곱 살 때까지는 분명 그랬습니다. 그 이후 많이 달라졌죠. 큰삼촌의 죽음 때문인가요? 그렇다고 해도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뼛속 깊이 외롭게 했으니까요.


 아홉 살 때 당신에게 받았던 첫 충격이 기억납니다. 그가 숙제를 늦게 끝냈다고 온몸을 몽둥이로 두들겨 팼잖아요. 당신은 쳐다보지도 않고 태연하게 안방에서 빨래를 개더군요. 투명인간이 된 줄 알았어요. 절박하게 쳐다보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데 끝끝내 외면하더라고요. 그가 무서웠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아무 일도 아닌 건 아니잖아요. 왜 한 번도 봐주지 않았나요? 몽둥이질보다 더 아팠던 건 절망이 가슴을 관통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당신은 방관뿐만 아니라 말로 칼침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동급생들에게 왕따를 당하던 저에게 “네가 그러니까 왕따를 당하는 거”라고 했죠. 당신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할 때마다 그 말을 했어요. 그 말 덕분에 오랜 시간 왕따에는 이유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3~4학년 때부터는 직접 폭력을 쓰기 시작했죠. 독서토론이 끝나고 바로 오라고 했는데 조금 늦게 왔다고 몽둥이로 온몸을 때렸어요. 손으로 몽둥이를 막다가 검지 손가락을 다쳐서 멍이 진하게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다른 곳보다 그 손가락 하나가 사무치게 아팠어요. 그게 저 같았거든요.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맞기 싫어서 학원으로 도망치는데 당신이 맨발로 뛰어왔어요. 괴물 같았죠. 왜 나를 때리려고 저렇게까지 쫒아오나 싶었어요. 학원 선생님 책상 밑에 숨어있던 저를 기어이 잡아내서 데리고 갈 때는 기괴하고 무서웠어요. 그날 당신이 저를 끌고 집으로 갈 때 마주쳤던 수많은 학원생들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거기엔 같은 학교 학생들도 있었어요. 같은 나이 또래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줄만큼 벌하는 일이 중요했나요? 아직도 묻고 싶습니다.

 

 가장 궁금한 건 그가 저를 죽이러 자취방으로 가겠다고 협박 전화했을 때, 왜 그를 안 말리고 “아빠, 거기로 갔어”라고만 했어요? 죽기 살기로 말렸어야죠.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보호해 주지 않겠구나.’ 처음으로 그를 경찰에 신고했죠. 저 하나 맞고 끝날 줄 알았던 당신은 생각보다 일이 커지자 그제 서야 황급히 그를 말렸던 모양이더군요. 대한민국의 훌륭한 경찰은 제게 집안일은 집에서 잘 해결해보라고 하고요. 수개월이 지나고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아빠가 당연히 안 죽일 줄 알고 그랬다”라고 했죠. 죽기 직전까지 맞는 건 괜찮나요? 강자한테 맞는 것 자체가 영혼이 산산조각 나는 일인데요. 영혼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서 좀비가 됐습니다. 가끔 아니, 꽤 자주 심장을 꺼내 뜯어먹어서라도 이 고통을 없애고 싶을 때가 있어요.


 악몽 같은 기억의 파편들을 안고 사는 삶에 대해 알고 계시는지요? 온몸에 생채기를 내며 구석구석 굴러 다닙니다. 피가 나고 너무 아픈데 다 제거할 수가 없어요. 이미 몸의 일부가 되어 버렸거든요. 떨쳐 내려고 해도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죠. 결국 ‘사랑의 매’라는 것에는 사랑이 없었던 겁니다. 한 사람의 성장판을 끊어버린 매질만이 남았죠. 당신들이 행했던 건 부모의 체벌도 폭력도 아니에요. 그저 강자의 약자를 향한 비겁하고 악한 폭력일 뿐 이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진실을 이제는 압니다. 당신도 알길 바랍니다.  


어느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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