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가 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2022. 11. 28. 15:42

by 로지

도구가 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기능적으로서 소비되는 사람이 있고,

인간으로서 대해지는 사람이 있다.



간단한 예로 정보성 블로거들은 전자에 속한다.

'카톡 가입하는 법'을 검색해서 들어오는 사람들은 정보가 궁금해서이지 그 사람이 궁금해서가 아니다.



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는 도구로서의 기능이 강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들은 것 중, 사람들이 나만 보면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이렇다.

'이것 좀 해주세요'

'저것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가 잘하니까 이것 좀 해라'

'네가 팀장이니까'

'네가 장남이니까'



사실 이런 건 양반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모른 채 멍하니 있는 팀원들에게, 내 스스로 '이거랑 저건 해야 하지 않을까요?'하고 묻고, '그걸 왜 해야 하는지'까지 하나하나 설명하고 납득시키지 않아도 되니까.



어쨌든 나는 도구로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꽤 오래전부터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꺼려 하게 되었다. 왜냐면 내게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나'라는 도구의 사용 권한을 주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구로서 활용되면서 나는 주위를 본다.

그들은 웃고 떠들면서 유희를 즐기고 있다.



일은 나의 몫이었고, 그 일로 인해 얻어진 자유는 그들의 몫이었다.



간혹 그들은 내게 말한다.

'너무 고생한다. 좀 쉬면서 해. 이리 와서 같이 놀자'



그들이 해야 했던 모든 일까지 도맡아 했기에, 내가 놀면 모든 시스템은 멈춰버린다는 것을 그들은 인지하고 있었을까?



그 까닭에 놀고 나서 (시간을 소모하고 나서) 더욱더 촉박해진 시간에 남은 일들을 더욱 높은 강도로 쳐내야만 했던 상황을, 그럼으로 인해 '논다'라는 것이 즐거운 게 아니라 고통스러운 것으로 내게 다가왔음을,



그러므로 노는 곳에 함께하는 것이 나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그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나의 또 다른 희생이었음을,



그들은 알면서 그렇게 쉽게 놀자는 말을 건넸던 것일까?



무엇이 문제였을까.

리얼월드에서 어느 한 쪽의 100% 과실은 없다. 리얼월드는 책이나 논문에 나오는 변수가 통제된 깔끔한 실험 상황이 아니다.



든든하고 믿을만해서 걱정 없이 맡기고, 내가 어떤 고통을 감내할지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기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자신들이 얻은 편리함만 누린 그들도 과실이 있다.



고통을 호소하며 나의 감정을 소통할 생각을 하지 않고 '역시 너희는 다 똑같아'라며 마음의 문을 닫았던 나의 과실도 있다.



(과실이 맞긴 한데, 그것 외에 또 무슨 수가 있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말했어도 하루 아침에 없던 공감능력이 생기지 않았을 테니. 괜히 상대에게 죄책감만 심어주고 설명하느라 아까운 시간만 더 쓰게 되지, 하는 생각도 한편으로 든다.)



어쨌든 타인에 대한 나의 기대는 매우 낮다.

'그럼 그렇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극소수의 나를 알아주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내게 최적화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컴포트 존을 벗어난답시고 스스로 도구가 되지 말자.

도구가 되지 않으면서도 컴포트 존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왜 나는 공개적으로 이 글을 쓰고 있을까?

훗날 과거가 반복될 때에 그 사람에게 이 글을 보여주고,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말해주면 좋을 것 같아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기회의 속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