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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헤현 Sep 03. 2024

여름과 사랑

<한여름의 판타지아> <최악의 하루> <치코와 리타>

한여름 밤의 꿈.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중 하나이며, 작품에 녹아든 한여름 밤의 몽환적인 분위기로 인해 제목 그 자체가 관용어로 쓰이게 된 희극이다. 이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한여름 밤의 꿈은 신기루와 같은 느낌을 준다. 홀연히 나타나고 불현듯 사라지며 잠깐의 아름다움으로 환상적인 인상을 남긴다. 오늘 세 편의 영화는 바로 이렇듯 신기루 같은, 여름날의 사랑이 어떠한 모습인지 보여준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 <한여름의 판타지아> 2015 장건재


영화감독 태훈은 영화 촬영지 답사를 위해 조감독 미정과 일본의 소도시 나라현 고조시에 방문한다. 그는 미정과 마을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누군가의 첫사랑, 누군가의 죽음, 언젠가의 태풍, 언젠가의 부흥과 언젠가의 쇠퇴. 사람이 오가지 않는 산속에 여전히 살고 있는 할머니와 이젠 폐교가 된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들의 추억. “미정 씨와 닮은 여성분을 안내해 드린 적이 있어요.” 태훈과 미정을 마중한 공무원이 말했다.


흑백으로 진행되던 시퀀스는 일본의 작은 도시로 여행 온 한국인 여성 혜정의 이야기로 바뀌며 컬러로 전환된다. 혜정은 고조시의 청년 유스케를 만난다. 유스케는 혜정의 고조 여행을 안내해 주기 시작한다. 둘은 고조의 작은 골목을 함께 걷고, 유스케는 고조의 전설 따위를 읊는다. 둘은 유스케의 추억이 담긴 곳으로, 어떤 할머니 집에 가고, 밥을 먹고, 서툰 일본어를 말하고 들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여름의 뜨거움과 일렁임이 둘 사이를 스며든다. 진득하고 흘러내려서 도저히 감춰지지 않는 무더움의 열기처럼, 소통되지 않는 언어 뒤로 숨은 망설임과 주저함에 그날의 마땅한 설렘도 감춰지지 않았다.


유스케는 말한다. “더 같이 있고 싶었어요.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혜정 씨랑.” 혜정은 말한다. “저, 남자 친구가 있어요.” 유스케는 말한다. “그럼 일본의 남자 친구.” 오늘 밤에 있을 불꽃놀이 축제를 같이 보러 가자고 말하던 사람. 여름밤 그의 고백이 여름밤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가 사라진다.



최악의 하루


©️ <최악의 하루> 2016 김종관


“진짜라는 게 뭘까요? 사실 전 다 솔직했는걸요.” 늦여름 서촌, 은희는 연기 수업을 받고 나오다 길을 묻는 일본인 남자에게 길을 안내해 준다. 은희는 남자의 직업을 물었고, 그는 거짓말을 하는 직업이라 말한다. 남자는 소설가다. 은희가 그의 이름을 묻는다. 료헤이, 은희는 금세 그의 이름을 잊는다.


은희는 남자 친구의 재촉에 료헤이와의 자리를 파하고 남산 산책로에 오른다. 배우병에 걸린 남자 친구 현오는 잘난 자신이 은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애정을 제공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애쓴다. 자신을 긁는 현오에게 짜증이 나지만, 그럼에도 잘생긴 그가 좋다. 그는 바람 피던 그 여자는 이제 만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기에겐 은희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오에 입에서는 끝내 다른 여자 이름이 나온다. 실수로 은희를 유경이라 부르고 만 것이다. 은희도 알고 있는 그의 양다리 여자 친구. 은희가 화를 낸다.


한편 은희에게도 다른 남자가 있다. 현오의 입으로는 유부남, 은희의 말로는 이혼남이라는 운철이다. 그가 갑자기 현오를 쫓아낸 은희 앞에 서 있다. 그는 은희가 올린 SNS를 봤다며 남산에 왔다. 은희는 그의 황당한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그가 뱉는 달콤한 말들에 기대와 희망이 싹튼다. “전 행복해지지 않기로 했어요. 재결합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인 것처럼 장황한 말을 늘어놓던 운철이 대뜸 재결합하겠다고 말한다. 은희는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피한다.


미안하다고 보채는 현오와 거짓말로 자리를 피한 은희를 쫓는 운철이 은희를 중간에 두고 남산 산책로에서 조우한다. 그저 피하고 싶었던 은희는 누구 하나도 붙잡지 못하고 홀로 남겨진다. 결국 남겨진 은희는 다시 료헤이를 마주친다. “요즘은 살고 있는 게 연극이에요. 오늘도. 지금까지.” “거짓말이요?” “네, 거짓말. 근데 연극 이런 게 할 때는 진짜예요. 근데 끝나면 가짜고.” “그럼 저랑도 연극 하는 건가요?” “뭐, 아마도.” 거짓말 같은 날들은 한여름의 신기루를 닮았다.



치코와 리타


©️ <치코와 리타> 2012 하비에르 마리스칼・페르난도 트루에바・토노 에란도


영화는 다름 아닌 ‘치코’와 ‘리타’의 이야기. 영화는 구두 수선공인 치코가 퇴근 후 라디오를 켜고 듣는 재즈 음악으로 시작된다. 한때 치코는 쿠바의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 리타와 만난다. 치코는 리타의 모습에 반하고, 그녀와 경연에 나가고 싶어진다. 치코가 연주하는 피아노 선율에 리타가 노래한다. 둘의 마음은 서로를 향한다. 그런데 치코의 여자 친구라는 여자가 찾아와 리타에게 욕을 쏟아낸다. 치코에게는 한여름의 불장난 같은 마음이었던 걸까. 리타는 실망하고 치코를 떠나려 애쓴다. 치코는 리타를 붙잡는다.


이후로 이어지는 치코와 리타의 사랑은, 우기의 찌는 더위 위로 쏟아지는 스콜처럼 잔뜩 쏟아지고 못내 그치기를 반복한다. 둘은 사랑하고 아파한다. 둘은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 둘은 춤을 추고 공연한다. 성공하고자 하고, 떠나고, 따라간다. 둘은 서로를 오해하고 상황은 그들을 착각하게 했으며 둘은 갈등한다. 이런 일들이 반복된다.


그렇게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치코와 리타가 잃지 못한 것은 재즈이며, 또 사랑이다. 오랜 시간 해소되지 못한 둘 사이의 열기는 그들 곁의 재즈 선율처럼 여전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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