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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im Dec 20. 2022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

박성원, <하루>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


 타인에게 무심한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문장이다. 타인의 하루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풍부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박성원의 <하루>에서는 그러하지 않은 우리 사회를 고발한다. “저는 그저 제가 맡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는 말 한마디에 두 사람이 죽는다. 여자의 아기와 남편의 직장 동료. 그들은 왜 죽게 되었을까. 그날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장 동료의 아이(소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많은 이가 각자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최소한으로만 책임지려 한다. 그 뒤에 서려 있는 타인의 복잡다단한 상황은 보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는다.


 소설과 함께 1990년대의 대형사고들, 2014년 세월호 참사, 2022년 이태원 참사의 망령들이 떠오른다. 자신이 맡은 바 그 이상은 하지 않는 복지부동과 무사안일주의, 그리고 타인(피해자와 그 유가족)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감수성 결여가 만들어낸 비극이자 사회 불안의 징후. 물론 대다수 경우에서 책임의식조차 제대로 실현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고, 각박한 사회에서 감수성이란 걸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시대를 마다하지 않고 계속 비극적인 사고가 벌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안의 징후는 사회가 변하지 않았기에 다시 나타났다.


 안타까운 사건 사고들은 하나의 표면적 징후일 뿐이다. 우리 사회는 안에서부터 곪고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의미 있게 다가온다. 바뀌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사회 불안의 징후는 또 다른 비극으로 발아해 우리를 덮칠 수 있다. 처벌과 억압 같은 금기의 채찍만으로 이러한 굴레를 막을 수는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책임 있게 수행하고, 주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스스로 고름을 제거할 수 있는 본질적인 일이다.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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