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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im Oct 17. 2022

지하실과 태양(1): 2×2=5

도스토옙스키, 《지하에서 쓴 수기》

 모든 인간은 그 시대의 증인이다. 작가는 우리를 타인 혹은 다른 세계와 연결하는 존재로서, 시대의 이야기를 작품 속에 담는다. 작품 속 인물을 통해 우리는 인생을 시뮬레이션해 본다. 그들을 따라가다 보면 딜레마에 빠지기도 하고 패러독스와 맞닥뜨린다. 종종 이러한 불편한 진실들이 사회와 인간을 예리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소개하는 지하생활자가 우리를 불편한 진실로 안내해준다.


1. 지하생활자와 태양

 지하생활자 ‘나’는 자존감은 낮고 열등감은 높은 인물이다. 그는 어렸을 적 고아가 되어 사랑에 대한 결핍을 느끼며 자라왔다. 사랑에 대한 결핍은 자격지심을 낳았고, 자격지심은 자기 소외를 야기했다. 그는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집단 내에 스며들지 못하고 겉돌았다. 타인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던 그는 먼 친척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유산을 물려받은 뒤 바로 관직 생활을 청산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조그마한 지하실에 은닉했다. 완전한 지하생활자로 자기 파괴적 삶을 살며 내면 안의 욕망을 독서와 글쓰기로 맘껏 발산했다.


 지하실에는 햇볕이 들지 않았다. 태양이 밝게 비추는 바깥 세계에서는 자신을 온전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직사광선 앞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포장되고, 내밀한 면모는 은폐되기 때문이다. 지하실에서는 그 혼자만의 세계가 펼쳐졌고, 그 속에서 고독을 맞이했다. 자신의 정신을 가학하며 안팎의 지하실을 인식했다. 겉모습과 이성으로는 감춰지지 않는 인간 내면의 위선과 본성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조악하고 초라한지 깨달은 그는 자신의 모습을 ‘생쥐 인간’으로 표현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의식을 할 수 있지만, 의식하는 순간 자신 안의 ‘쓰레기 더미’를 발견하기 때문이었다.


 이성으로만 정의하기에 인간은 너무나 복잡한 존재이다. 그러나 태양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자신이 합리적인 존재인 것처럼 위선을 부린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생쥐 인간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지하생활자는 자유의지를 발휘함으로써 진정한 인간의 삶을 살아간다. 결국, 인간의 삶은 숫자와 통계로 점철된 아름다운 수정궁이 아니라 사랑, 인정, 관심을 필요로 하는 쾌쾌한 지하실인 것이다.


‘아, 누가 처음으로 단언했는가? 누가 최초로 선언했는가? 인간은 자기의 이익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너저분한 짓을 한다고. 인간을 계몽해 그에게 제대로 된 진짜 이익에 대해 눈을 뜨게 해 주면 그는 곧바로 너저분한 짓을 중단하고, 착하고 고상한 사람이 된다고. 왜냐하면 계몽되어 자신의 진짜 이익을 깨닫게 된 나머지 선행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알다시피, 아무도 자신의 이익에 고의로 반하는 짓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선을 행하지 않겠느냐는 의미이다. 아, 얼마나 유치한 발상인가!’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길 좋아하지, 이성과 이익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자신만의 욕구, 제멋대로 보일 수 있는 심한 변덕, 때로는 광기에 근접하는 듯한 환상, 바로 이런 것이 우리가 간과했던, 가장 유리한 이익이다.’


*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가 예언한 바는 실로 놀랍다. 19세기의 위대한 작가-사실상 소설 속 지하생활자가 작가 자신이다-가 예언한 바는 21세기에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 '지하실과 태양(2)'에서는 그 부분을 집중 조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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