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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im Oct 17. 2022

지하실과 태양(2): 2×2=5

도스토옙스키, 《지하에서 쓴 수기》


 모든 인간은 그 시대의 증인이다. 작가는 우리를 타인 혹은 다른 세계와 연결하는 존재로서, 시대의 이야기를 작품 속에 담는다. 작품 속 인물을 통해 우리는 인생을 시뮬레이션해 본다. 그들을 따라가다 보면 딜레마에 빠지기도 하고 패러독스와 맞닥뜨린다. 종종 이러한 불편한 진실들이 사회와 인간을 예리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소개하는 지하생활자가 우리를 불편한 진실로 안내해준다.


2. 현대인과 포장된 자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 바깥의 지하실에서 스스로를 은폐한 채 태양으로 알레고리화된 이성적 삶을 동경한다. 정작 내면 안에 있는 쾌쾌한 지하실은 인지하려 노력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들은 언어보다 숫자와 통계를 신봉하고, 감정보다 합리를 강조하며 기계적인 사고를 한다. 이성적 삶을 좇는 듯하지만 그러한 행태가 자신을 얼마나 파괴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어떻게 포장하는지 알지 못한다.

 현대인이 지하실에 숨어 태양을 찬양하는 경향이 강해진 데에는 적(enemy)과 목소리(voice), 서사(narrative)가 사라진 현실이 기여한 바가 크다. 현대의 지하생활자들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곤 ‘포장된 자아’뿐이다. 초연결 사회에서 SNS 등 자기표현 기제가 다각화, 고도화되면서 그들은 스스로를 포장하기 바쁘다. 타자의 존재 의미는 자신의 포장된 자아를 소비하는 데 있다. 이로써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 다양한 목소리의 부재는 갈등 조율과 대화의 필요성을 제거함으로써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목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지게 다.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듣지 않다 보니 그들은 즉각적인 것을 선호한다. 긴 시간 진행되는 서사는 지양하고, 짧은 순간 생산되는 에피소드(episode)를 지향한다. 자신의 사고를 길고 논리적으로 펼쳐내기보다 짧고 즉흥적으로 내뱉는다. 미리 단정지은 추상적 결론에 강하게 집착한 나머지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한다. 보이는 것을 보지 않으려 하고, 들리는 것을 듣지 않으려 하며, 오직 자신의 논리만 정당화하려 한다. 강화된 자긍심은 포장된 자아만을 다시금 남김으로써 자신이 쓰레기 더미 속 생쥐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3. 2X2=5를 기억하라

 우리 사회의 적지 않은 이들이 지하생활자로 변해가고 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지 못하며, 오롯이 자신의 목소리에만 과도하게 집중하는 현대인이 점점 늘어간다. 그들은 더 이상 우리 사회의 비주류가 아니다. 오히려 포장된 자아로 인해 분열증 같은 각종 정신질환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들의 삶에는 여느 시대보다도 태양빛이 강하게 내리쬐고, 그 열광은 2X2=4 같은 공식에만 착하고 있다.

 2X2=4가 틀렸다는 게 아니다. 다만 2X2=5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중요하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의식하다 보면, 2X2=5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간이 자유롭지만 고립될 수밖에 없고, 고립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쏟아지는 열광을 막고, 내면 속 쾌쾌한 지하실을 드러내야 한다. 삶이 모든 비극에도 여전히 아름다워질 수 있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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