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고 Feb 18. 2016

20대의 연애는 아플 수밖에 없다

케이크와 뱅쇼 앞에서


제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철학과 교수님과 밥을 먹었다. 항상 내게 아낌없는 지지와 물질적 후원을 해 주시는 분이다. 이분은 항상 따뜻하고 반짝거려서, 가만히 그분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햇살 좋은 날 손바닥 위에 올라 있는 유리구슬을 보는 것 같다. 어제 우리는 파전과 막걸리를 먹었고, 자리를 옮겨 뱅쇼와 오렌지 케이크를 먹었다. 먹고 또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Adrift, Jeremy Lipking (1975~), Oil on linen, 개인 소장


주제는 다양했다. 자본주의와 삶, 사람의 멋, 잘해보고 싶은 마음과 실수, 그리고 연애 이야기. 세속적인 이가 그렇듯, 그 날 이야기했던 모든 주제들 중 가장 내 가슴을 울렸던 말은 연애에 대한 교수님의 코멘트였다. 속물러 답다.


S야, 20대의 연애는 아플 수밖에 없어. 당연한 거야.
자기가 얼마나 상대에게 기대를 거는지 평가하고, 단두대에 올리지 않고서야
어떻게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를 찾을 수 있겠니?



이 코멘트는 스승님께서 4년 전부터 해오시던 말씀이었다. 20대의 연애는 아픈 거라고. 아프지 않으면 이상한 거라고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어제 그렇게도 생생히 날아와 박혔던 건, 내 지난 연애에 대한 생채기가 막걸리의 취기와 함께 발갛게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사실대로 이야기 하자. 지난 나의 연애는 아팠다. 그러나 이별이 찾아온 것은 내가 그 상처를 피하지 않고 맞섰기 때문이었다. 아픔을 정면으로 대해야 할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어지러웠고, 말끔한 정신을 가지고 그 사건을 대할 수 없었다. 미숙했고, 비틀거렸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별했다. 데이트란 걸 채 시작하기도 전에, 단단해지기도 전에 일어난 일 이었다. 그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별은 그 사람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참 많이 힘들었다. 평소 참으로 밝다고 생각했던 내게 우울증 비스무리 한게 찾아왔다. 아무 힘도 없고, 의욕도 없이 잠만 늘었다. 덜컥 겁이나서 병원을 찾았더니 초기 증상이란다. 조금 더 지켜보자고 하길래 괜찮다고 뚝 끊었다. 집에 오는 길에 그 사람을 생각했다. 그 사람과 다투게 된 이유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였는데. 바보같이 그 사람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했다.


Bedside, Jeremy Lipking (1975~), Oil on linen

과거를 회상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생각에 빠져 있다가, 스승님께 말을 건넸다.

S:
선생님께서는 어떠세요? 저는 선생님처럼 쿨한 연애는 아직 못 하려나 봐요. 쿨한 연애가 있음을 동조할 순 있겠는데 그것이 제 것도 아닌 것 같고, 참 생각대로 잘 안 되는 거 있죠.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시던 스승님은,

스승님:
아냐, 그건 아니야. 나의 20대의 연애도 그랬어. 장난 아니었어. 질질 짰지. 내가 우리 신랑한테 보낸 DHL 소포가 족히 백 개는 넘을 거야. 그리고 그렇게 단단해져서 된 게 우리고, 지금의 내 남편이야. 


우리 두 사람, 연애 정말 지겹게 했어. 몇 번이고 단두대에 올랐어. 지금의 믿음은 그런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우리 둘은 열한 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오는 날도 있어. 그래도 남편이랑 나는 대화해. 오늘 누굴 만났고, 무슨 생각을 했다고. 그런데 과거에 우리가 서로 실망하고, 울고, 또다시 만나고 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 모습을 가질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닐 것 같아. 평생 함께 할 사람을 만나는 일인데, 내 목을 기꺼이 올려놓지 않고서 어떻게 그 사람이 끈을 놓아버릴지, 아닐지 알 수 있겠어? 부부는 평생 볼 사람이야, S가 그랬던 것도. 그 친구가 S에게 한 일도. 둘 다 연인보다 길게 생각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해.


S:
그럼, 제가 겪은 일은...

스승님:
당연한 거야. 그리고 S가 겪었던 상대의 쿨한 행동은 너무 차가워. 지금의 나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20대엔 있어선 안 되는 일 이었어.
 S가 겪었던 일은 적어도 나의 기준에서만큼은 예의가 아니야. (중략) 그러니까 지금 많이 아파해. 다음 만남에게 미안하지 않게. 미리 많이 아파해 놔. 이십 대엔, 그게 당연한 거니까.


Long way home, Jeremy Lipking (1975~), Oil on linen


이십 대의 연애가 아프지 않다면 나중에 실수한다는 말씀이, 평생을 볼 사람을 만나는 일에 서로 맞춰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에 시간이 무겁게 흘러가는  듯했다. "괜찮아. 그 친구가 나빴어" 혹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힘내." 같은 상투적인 위로보다 더 많은 온기를 느꼈던 어제였다. 상대의 시간에 맞춰 걷는 것도, 나의 시간에 대해서 아는 것도 필요함을 느낀 어제였다.


황경신 시인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세상에 쉬운 이별은 없다고.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이별 이전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라고, 누가 누구를 기쁘게 한 적도, 누가 누구를 불안하게 만든 적도 없었던 거라고. 그러므로 애써 잊어야 할 감정도 고난히 헤어져야 할 사람도 없는 거라고.


나는 아직 앓는 중이고, 아직 그 사람을 그린다.


친구 seiing이 추천해 준 곡, 어쿠루브 (Acourve) - 우연이라도




P.S: 사연을 쭉 읽은 친구가 말 없이 노래 한 곡을 추천해줬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의 균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