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 베트남 열흘

#9 Life is full of surprises

by Snoopyholic

밤은 요물이다.

사람의 기분을 흔들어댄다.

거울과 화장품이 있는 욕실은 변신의 고향이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얼굴에 다른 겹을 입혔다.

그리고 밤이 부리는 요염에 휘말리고 흔들린 발걸음으로 심장까지 두드려대는 음악의 비트를 찾아 도시의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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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역시 또 길을 잃었다는 것. 마음에 드는 클럽은 보이지 않았고 그냥 시끄러운 음악만 있는 바밖에 없었다. 모르겠다. 음악이 쿵광거리는 곳은 어디엔가 또 있겠지..... 이왕 길을 잃은 김에 야밤의 탐방이라 생각하고 돌아다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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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맞닥뜨린 건 누군가의 죽음.

가족들이 둘러서 슬며시 눈물을 닦아내거나 웃으며 담소를 나누거나...반갑게 인사를 나누거나......

뭔가 다양한 분위기가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인 나를 발견하더니 손짓으로 불러 자리에 앉히고는 음식을 대접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곳에 앉아 이래도 되는가를 생각하다가 아니, 내가 온 마음을 다해 망자의 가는 길에 축복을 빌어준다면 그 또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죽음은 끝이지만 시작이기도 하다.

나는 누군가의 끝을 목격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것.

하노이의 저주(?)로 호이안까지 힘든 여정이었지만 사이공에서의 시간은 따뜻하지 않았던가!!

나에게 사기 치려는 사람보다는 따뜻한 점심을 내어주는 사람들과 이렇게 독특한 문화를 체험하게 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고....이건 행운이나 다름없다는 생각.

음식을 꼭꼭 씹어 먹고 안으로 들어가 내 나름의 예를 갖춘 뒤 나를 초대해준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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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좀 더 헤맨 뒤 드디어 발견한 마음에 드는 클럽.

하, 그리고 그곳에서 하노이 공안차를 함께 타고 9시간의 여정을 함께했던 일행을 만났다.

우리는 추억을 되씹으며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

마치 이제는 그때의 일을 털어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비장한 몸짓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고 나도 다시 길을 왔던 길을 되짚어 호텔로 돌아왔다. 기적처럼 한 번도 길을 잃지 않고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오니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가 몰려왔다. 샤워를 할까 하다가 일단은 세수, 양치질만 하고 자기로 결정했다.

불을 끄기 전 아까 낮에 잔뜩 쇼핑한 베트남 차를 바라보며 어찌나 흐뭇했는지 모르겠다.

여기저기 고마운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정말 무리해서 많이 사서도 사들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걱정도 엄습하기 시작했다.

지갑을 보니 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당장 내일 아침에 거리로 나가 반미 하나라도 사먹을 1000동도 없었다.

여행을 떠나며 분명 넉넉하게 돈을 챙겨왔다고 생각했는데 200달러 사기 당하고 계획에 없던 당일 비행기까지 끊었으니.....돈이 떨어진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호텔비도 내야 하고 아직 이틀 정도 더 지내야 하는데.....곤란한 일이었다.

돈을 넉넉하게 챙겼다고 굳게 믿으며 일부러 신용카드도 안 챙기고 대신 비상시를 대비해 돈을 송금받을 수 있지만 텅 빈 계좌의 체크카드만 챙겨왔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한숨도 내쉬었다. 그 속에 조금이라도 돈을 좀 넣어두었다면 이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

어쨌든 분명 한국으로 여러 개의 문자를 날려두었는데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 국제전화 한 통 걸면 될 일이었다. 들려오는 모친의 따발총 잔소리를 들어야 함은 기본이고 그걸 듣는 동안 비싼 국제전화 요금이 착착 내 청구서에 올려질 것이었다.

(그때는 요즘처럼 심카드만 바꿔끼면 되고 인터넷이 가능한 스마트폰의 시대가 아니었기에....)

어디 그뿐이던가... 돈을 송금받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또한 관건이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시끄러운 바의 음악도 꺼진 아주 깊고 깊은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고.....

여전히 가족으로부터 소식은 오지 않았고.........

지갑엔 무일푼이었다.

해맑은 나의 위장은 주인의 마음과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음식을 요구했다.


ㅠ_ㅠ


우선 아리따운 리셉션의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 뒤 근처에 국제 ATM 쓸 수 있는 곳이 어니냐고 묻고 지도에 표시해서 밖으로 나왔다. 아예 기계 앞에서 전화를 걸어 돈을 송금받자마자 인출할 계획이었다. 가는 길에는 많은 반미 코너가 보였고 저게 500원이면 먹는 것인데 내 수중에 그 돈이 없다는 사실이(300원 정도의 돈만 남아 있었다. 400원만 됐어도 어떻게 딜을 쳐보는 것인데 베트남어도 안 되는 와중에 500원짜리를 300원으로 깎는 건 너무 '가오'가 안 서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포기함) 조금은 서글퍼졌다. 그래도 최대한 다운되지 않기 위해서 나를 여행자 모드로 추슬렀다. 마침 시클로 아저씨가 보여서 한 장 찍기로 했다.

나도 저 아저씨처럼....그냥 맘 편히 잠이나 자고 싶구나....

생각하며 셔터를 누르는데 갑자기 누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허허, 이제 환청까지 들리는구나.

내가 그렇게 배가 고픈가?

그 정도는 아닌데. 왜 이러지....


다시 가던 길을 가려는데 다시 내 이름이 들렸고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돌아보니 내가 몇 번 옷을 샀던 가게의 주인!!!!!!!!!!!!!!!!!!!!!!


"어머! 여기 웬일이에요?"

"그러게!! 난 신혼여행 왔어요."

"전 휴가 왔어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커피라도 한잔 마셔요! 내가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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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우리는 카페로 들어갔다. 차를 쭉쭉 빨며 그녀의 호화롭고 아름다웠던 신혼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캬~ 좋구나.....운이 좋은 사람은 저렇게도 쫙쫙 풀리는구나 부러운 마음으로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눈을 빛내며 내 여행 이야기를 궁금해했던 그녀에게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ATM을 찾아가는 길이에 우리가 만난 거라는 말을 하는데 정말 내내 말 한 마디도 안 하던 과묵한 경상도 남자였던 그녀의 남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베트남에 온 지 얼마나 되셨다고요?"

"일주일이요."

"일주일 동안 그 일을 다 겪었어요?"

"네."

"한 달은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 같은데....."

그 사이 그녀는 저 빵을 사왔다. 그야말로 눈물 젖은 빵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녀는 나에게 돈을 빌려줬다. 오늘과 내일을 지내고 호텔비를 치르고 공항까지 갈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갑자기 정말 울컥했다.

내내 이 여행이 왜 이렇게 나에게 시련을 안기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댔는데.....기적처럼 사이공의 한복판에서 누군가를 만나 도움을 받게 됐다. 모친의 잔소리도 들을 필요 없었고 더운 날 손으로 부채질하며 ATM 앞에서 뻘쭘하게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그간 나를 외면했던 하늘이 미안해서 이런 순간을 나에게 선물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리 타국에서 우연히 만나 기꺼이 곤란에 빠진 나를 건져준 그들에게 너무 고마웠다.


인생은 정말 놀라움의 연속인 무언가임이 분명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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