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노동의 나날들_03
구인공고를 볼 때는 몇 가지 굵직한 업무에 대한 것만 보이고 자잘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혹은 구인공고에는 몇 가지 굵직한 업무에 관한 것만 강조되어 잘 설명되어 있고 자잘한 것들은 교묘하게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이 일 역시 그랬다. 공고에는 분명 어렵지 않고 쉽고 심지어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인 것처럼 멀끔하게 포장되어 등장했지만.......
그 포장을 뜯고 열어본 현실이라는 상자 속에는 그야말로 각종 잡다한 업무들이 뒤엉켜 있었다.
공간을 청소하는 일, 포장재가 떨어지기 전에 채워 넣는 일, 신선도를 체크하는 일, 유통기한을 체크하는 일, 냉장재와 냉동재를 보충하는 일,
물건이 떨어지기 전에 진열장에 채워 넣는 일, 고객센터와 연락하는 일, 재고를 조사하는 일.............진열장을 조립하는 일까지!
이런 물류 전문으로 일하던 어떤 동료는 진열장을 조립하는 잡무는 인건비가 싼 외국으로 외주를 줘서 재료를 조립해서 들여오는 것이 훨씬 더 싸게 먹힐 거라는 결론까지 낼 정도였다.
종이를 분류해 끼우고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 도구를 박아넣으려면 손이 아픈 데다가 거기서 나온 잔해들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일이 상당히 귀찮으니 차라리 회사가 외주를 맡기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가장 싫었던 잡무는 냉장 전수조사다.
냉장에는 각종 채소와 과일 같은 신선식품이 매일 들락날락하면서 중간중간 신선도 문제로 빠지는 물건까지 있어서 시간도 잘 맞추지 않으면 안 됐다.
물건의 위치와 개수가 전산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면 된다.
여름엔 시원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여름이어도 맡은 분량의 물건을 조사하고 있노라면 점점 으슬으슬 추워지는 곳이 냉장 칸이다.
뭐 어려운 것도 아닐 텐데 그렇게 싫었나? 하면 오산이다.
이걸 꼭 두 번 하게 해서 싫었던 거다.
처음에는 그냥 단순히 일을 두 번 시키는 게 싫었는데 알고 보니 일부러 더블체크하게 한 것.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면서 기분이 별로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해 보니 업체 입장에서는 상품이라는 것이 자산이고,
이걸 전수조사하는 것은 자산을 관리하는 작업이다. 그러니까 급여를 주며 일을 시키는 우리에게 그 작업을 맡기는 건 이들 입장에선 당연한 것이다.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위에서 시키면 직원인 나는 그걸 해야 하는 것.
냉장 칸 안은 추우니 입고 작업하라고 방한복도 구비되어 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배려까지 마친 셈이리라.
내가 하겠다고 뛰어 들었고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내 가치가 과연 이 냉장 칸 안에 진열된 오늘 막 입고된 한우나 신선해서 반짝이는 딸기만큼은 될까 괜히 씁쓸해지는 날들도 많았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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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냉장은 그나마 나았구나.
매달 한 번씩 있었던 냉동 전수조사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던 기억이 나네.
아무리 방한복을 입고 손난로를 들고 들어가도 영하 25도의 냉동칸에서 물건을 조사하면서 얼어붙어 나오지도 않는 볼펜으로 체크하며 손발이 얼어붙는 기분을 느끼는 건....
몇 번이고 나와 몸을 녹이고 들어가야 했다.
첫 달엔 얼굴에 동상을 입고 특히 빨개진 코 때문에 주정뱅이라고 며칠 놀림을 받기도 했다.
진짜 술이라도 퍼 마시고 그렇게 됐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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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을 관리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잡무가 필요한데 과연 나는 내 삶을 관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잡무를 기꺼이 감당했나를 떠올린다.
내 가치가 한우나 딸기만큼이나 될까를 떠올리며 감상에 젖을 게 아니라 내 안에 갖춰진 자산이 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자산을 활용해서 더 큰 결과를, 성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나만의 잡무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더 이상 영하 25도의 냉동칸으로 들어가 머물며 남의 자산을 관리해주느라 내 몸을 얼리고 싶지 않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