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만남
4_
새벽의 푸르스름한 어둠을 뚫고 공항으로 향했다.
동생이 배웅해주겠다 했지만 만류했다.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고 그래야만 이 모든 여정이 끝난 뒤에 내 마음이 완벽하게 깨끗해질 것이라 생각했기에 조심하고 싶었다.
몇 년도 아니고 몇 개월 뒤면 돌아올 여정에 유난 떨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공항버스에 오르니 헤더와의 통화 이후 무거워진 마음이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일정을 바꿔 그녀와 며칠이라도 함께 해주다가 스페인에 갔어야 했던 건 아닌지, 암에 좋다는 음식의 목록이라도 보냈어야 하는 건 아닌지, 제이미는 내가 불쑥 보내버린 이메일의 내용을 이해했을지,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산티아고로 가는 그 길이라는 곳이 정말 내게 궁극적인 대답을 줄 수 있을지 등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먼지처럼 내 주위를 부유했다.
그런 침울한 마음은 공항에 도착해서도, 몸을 실은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도 계속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둥글고도 네모난 비행기 창문이 깨끗하지 않아서 비행기를 탈 때면 늘 낙으로 삼았던 구름 구경도 힘들었다.
아, 우울하다.
기분전환을 위해 일기장을 펼치고 이번 여행의 기록을 시작하기로 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에 대해서 조사를 시작하면서 그 길이 정말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장 유명한 일례로 많은 사람들에게 <연금술사>로 알려진 파울로 코엘료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것도 그가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대해 써낸 <순례자>라는 책이었다.
당나귀와 함께 길을 걸으며 생긴 해프닝을 써서 인기가 높은 책도 있었다.
심각하게 책 말고도 인터넷 세상에서는 그곳을 걸은 사람들의 다양한 체험을 생생하게 사진과 함께 접할 수 있었다.
다들 자신만의 색깔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데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가, 진지해졌다가, 감동해서 울다가 하며 마치 여러 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곤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모든 형태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에 대한 이야기에 관통하는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것.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 존재하는 특별한 에너지가 길 위에 흐른다!
옛날에는 중죄를 지으면 맨몸으로 길을 걷게 하고 만약 그 사람이 완주를 하면 죄를 사하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는 도중에 탈수현상으로 쓰러지거나 들개의 습격을 받는 등 끝까지 살아서 완주에 성공하는 확률이 매우 드물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무사히 고통과 고난을 극복하고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자신이 지은 죄를 사함 받는 것과 동일하다고 믿었단다. 이는 곧 그들에게 천국행을 의미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신이 쌓아온 죄를 사함 받을 정도의 큰 보상을 받는다고 믿었는지 나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야곱이었다. 야곱은 도처에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는 그 길을 걸으며 복음을 전파했다.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해서 길고 힘든 여정을 통틀어 일곱 명의 신도를 설득하는데 그쳤다고 한다.
그 옛날 걸어서 서로 멀찌감치 떨어진 마을이나 도시를 찾아가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예수의 제자였던 자신을 소개한 뒤 열성적인 설교로 많은 사람들을 주의 길로 인도하길 바랐던 야곱을 생각하면 일곱 명이라는 숫자가 참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그는 산티아고 대성당에 자신의 뼈를 묻었다.
비록 일곱 명을 설득하는데 그치긴 했지만 이후 그가 복음을 전파한 길은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야곱이 지나가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수많은 교회와 그를 둘러싼 전설, 기적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물론 종교적 가치관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던 시절에는 성인의 길을 따르려는 신앙적 이유가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자연적 난관이나 신체적 한계 같은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인간의 모험심 역시 그 길로 사람을 불러 모으는 데 한몫 했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종교적 이유가 주였던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카톨릭이나 기독교의 힘이 약해지고 신도의 수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는 듯했으나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 지정 등에 힘입어 천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주는 특이한 힘을 가진 이 길을 걸으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지은 죄를 청산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는다는 이야기.
일기장에 이것저것 끼적거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맨 마지막에 ‘초심을 잃지 말자’는 문장을 덧붙였다.
순수하게 나를 위해 떠난 여행이니만큼 지금부터는 될 수 있으면 오직 내 자신의 행복만을 생각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나흘 정도는 바르셀로나에서 역사와 문화를 즐길 뿐만 아니라 아무 죄책감 없이 그저 놀면서 곧 순례자라는 신분이 되는 내 영혼을 위로할 것이다.
이후 다섯 주는 경건한 마음으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걸으며 그간 내가 살아오며 쌓아온 인생의 짐과 죄를 청산할 것이다.
와인이 유명한 지역을 통과한다는데 내 영혼을 와인으로 정화한답시고 너무 많은 와인을 마시지나 않을지 조금은 걱정이기도 했다.
긴 여정을 거쳐 마침내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내친김에 옛날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던 피니스테레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해주고 나머지 기간은 정열의 안달루시아 지방을 여행하며 그들이 뿜어내는 뜨거운 기운을 받아오리라.
앞에 붙은 스크린에 표시된 비행기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였다.
스튜어디스에게 화이트와인을 부탁했다.
한잔 마시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났더니 그곳이 바르셀로나라면 얼마나 좋을까.
5_
낯선 이국의 냄새가 나는 바르셀로나의 국제공항에는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마중 나와 있었다.
군중 속에서 사진으로만 봤던 알베르토의 얼굴을 식별해내기 위해 집중하다가 풉,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Welcome, (삐뚤빼뚤하게) 세라’가 적힌 A4용지를 든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사진보다 훨씬 잘생겨서 흠칫 놀랐다.
“마중까지 나와 주다니 고마워.”
“반가워, 닉이 잘 모시라고 어찌나 신신당부를 했는지 몰라. 배고프지 않아?”
“좀 출출하긴 해.”
“집에 짐 놓고 바로 나가자.”
레스토랑은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열렬하게 수다를 떨며 식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조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피자를 우물거리는 나에게 알베르토가 설명을 시작했다.
“자, 지금부터 이런 풍경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될 거야.”
“응? 이런 풍경?”
“대체 이 시간에 왜 식당이 사람들로 북적이는지 궁금해 하고 있는 거 아냐?”
“어떻게 알았어?”
“이 집의 이 맛있는 피자를 너처럼 눈 둥그렇게 뜨고 천천히 우물거리는 사람은 단연코 없어!”
“들켰네. 그렇다고 내가 이 피자를 맛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냐. 뭔가 이국의 풍경이 압도적으로 느껴질 뿐? 레스토랑만 그런 게 아냐. 바깥을 봐. 지금 분명 평일 밤 11시인데도 바깥에 사람들이 저렇게 많다고. 다들 휴가라도 낸 거야?”
“하하, 나무라는 건 아니니 안심하시고. 이 도시에는 밤의 생명이 긴 편이야. 9월이지만 낮에는 아직 꽤 더워. 그러니 사람들이 밤에 노는 거지. 내가 언제 제대로 된 바르셀로나의 밤을 보여주도록 하지. 시에스타가 뭔지는 알아?”
“낮잠 자는 거 아냐?”
“그래. 그런데 정말 시에스타를 체험해본 적이 있느냐고.”
“나 낮잠 자는 거 좋아하는데?”
“이 아가씨가 잘 모르는 게 분명하구먼. 2시부터 4시 정도까지는 문을 닫는 곳이 꽤 있어.”
“레스토랑들은 원래 그 시간에 쉬잖아.”
“아니, 레스토랑 말고도 다른 숍들도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아. 요즘은 국제적인 브랜드들이 늘어나서 안 그런 경우가 더 많지만 대도시만 벗어나도 시에스타가 뭔지 제대로 맛볼 수 있지. 도시 전체가 낮잠에 빠져든다고 생각해봐.”
“에이, 설마.”
“너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걸을 거라고 했지? 그때가 되면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게 될 거다.”
“아, 네, 잘 알겠습니다, 박사님.”
“나 스페인 남자야. 하하하. 내가 서울 가면 네가 박사님이 되겠지. 피자는 다 먹었으니 사막 먹을래?”
“사막?”
“그래, 사막.”
“사막을 어떻게 먹어?”
“D.E.S.S.E.R.T, 후식 말이야. D.E.S.E.R.T 말고. Dessert, 스페인어로는 뽀스뜨레Postre.”
“아아, 미안, 내가 좀 피곤한가봐. 어떻게 디저트가 기억이 안 나냐. 아무튼 배불러. ‘사막’은 다음 기회에 먹자구.”
내가 미소와 윙크를 날리자 알베르토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뽀스뜨레는 그라시아스와 아디오스, 올라 이후 처음으로 배운 스페인어가 됐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