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첫키스
6_
벽에 춤추는 나부의 그림이 크게 그려진 알베르토의 방에서는 조심스럽게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그것은 떠오르는 순간, 떠돌아다니는 작은 먼지조차 다 드러내 보이겠다는 강렬한 의지로 거센 파도가 부서진 거품처럼 하얗게 들이닥쳤다.
나부는 이제 춤을 멈추고 햇살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수면 위로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아직은 눈을 감고 잠과 어둠의 영역에 머물고 싶은 나와 침대 위의 잠을 몰아내고 도시의 거리로 밀어내려는 태양의 신경전은 언제나 나에게 붉은 꿈을, 붉은 바다 위를 표류하거나 타오르는 붉은 나무를 보거나, 붉은 호숫가를 걷는 이상한 꿈을 꾸게 했다.
사실 이 도시에서의 시간 중에 이상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런던이란 도시에 사 년이나 살면서, 이렇게 매력적인 바르셀로나에 한 번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제이미와 사귀는 동안 휴가를 계획하는 단계에서 이 도시 혹은 스페인이 거론될 때마다 그는 과거를 들먹이며 가고 싶지 않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세계 지도 위에는 우리 둘 다 가본 적 없는 다른 나라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나도 굳이 사랑하는 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어딘가에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바르셀로나가 새롭고 낯선 곳이라는 사실이 나에게 더 유리하게 작용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도시에 와본 적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바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걸었을 것이다.
아니면 스페인의 다른 도시에 들렀다가 그 길을 택했거나.
다음으로 이상한 것이 내 옆에 잠들어 있는 알베르토였다.
닉에게 바르셀로나에서 사나흘 머문 뒤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을 걸을 예정이라는 소식을 그는 거기에 아주 좋은 친구가 하나 살고 있으니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손님방도 있으니 재워줄 수 있는지 연락해서 스케줄을 확인해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런던에 살 때도 친구들이 놀러 와서 소파나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고 가는 일이 흔했던 나는 여행을 준비하며 바르셀로나의 호텔비에 한숨 쉬는 일이 잦았던 터라 기꺼이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나흘.
하늘색과 흰색으로 꾸며진 손님방에서 춤추는 나부가 있는 그의 방에서 아침을 맞이하기까지의 시간.
***
회사원인 알베르토는 아침 7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7시 30분에 아침식사를 한 뒤 8시 15분에 집을 나섰다. 8시쯤 일어나 밖에 나가 보면 커피의 향기와 토스트의 향기가 가득했다.
식탁에는 신선한 과일과 두세 가지 잼과 버터가 올라와 있다.
하품을 하며 눈곱도 안 떼고 자리에 앉으면 말끔하게 면도하고 깊고 진한 눈의, 슈트를 입은 알베르토가 토스트를 넣어줬다.
언젠가는 반드시 물어보리라 생각만 하고 한 번도 물은 적은 없는 좋은 향기가 그의 주변을 떠돌았다.
느릿느릿 음식을 먹으며 그날은 어떤 일로 바르셀로나에서의 시간을 채울지 궁금해 하는 그에게 계획을 보고하면 그는 교통이라든지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나 들러야 할 카페를 적어준다.
그리고 퇴근에 맞춰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한 뒤에 재미있게 놀라고 말하고는 출근.
식사를 마친 뒤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마친 뒤 옷을 갈아입고 여행객으로 집을 나선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이드북 론리플레닛(Lonely Planet)을 벗 삼아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아다녔다.
몇 시간이고 천천히 관람하다가 뇌가 과부하 상태가 되어 이 작품이나 저 작품이나 비슷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관람을 중단하고 밖으로 나와 알베르토가 알려준 근사한 노천카페나 바에 테이블을 잡고 앉아 벌침처럼 내리꽂히는 태양을 쬐며 시원한 맥주나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태양이 견디기 힘들게 뜨거울 때는 안으로 들어가 아담한 사이즈의 달콤한 케이크를 곁들여 홍차를 우려 마시기도 했다.
일기를 쓰거나 친구들에게 엽서를 쓰는 일도 주로 이 시간에 이루어졌다.
나는 그렇게 급속히 바르셀로나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이 근사한 도시에서의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긴긴 하루를 마무리하고 들어오면 알베르토가 다정하게 물었다.
“오늘은 뭐했어?”
“응, 고틱지구에 있는 피카소 박물관에 갔었어.”
“피카소 박물관? 거기 사람 엄청 많지!”
“아침 일찍 나선 덕에 30분밖에 안 기다렸어.”
“30분? 그렇게 오래 기다렸다고? 밖에서?”
“그럼 어떡해. 피카소 작품을 보려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데.”
“난 그래도 피카소는 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왜?”
“큐비즘인지 뭔지 괴상망측한 그림들을 내세우는 것도 그렇고... 너 몰라? 그 예술가한테 희생당한 여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응, 그런 이야기들 들은 적 있지.”
“같은 여성으로서 화도 안 나?”
“나도 그 단계를 거치긴 했는데 그렇게 따지고 들면 좋아할 수 있는 예술가가 별로 남지 않겠더라고. 그래서 포기. 예술가의 인생이 아니라 예술로서만 판단하기로 했지.”
“전문가처럼 들리네?”
“전문은 무슨, 애호가라고 불러주시길.”
“거기서 나와선?”
“구엘공원.”
“또 갔어? 그저께인가 가지 않았어?”
“그냥 거기가 너무 좋아. 자꾸 가고 싶어져.”
“가우디가 지은 건물이 이 도시에 많다는 건 알지?”
“알아. 그래서 내일은 가우디의 날로 정하고 다른 곳들도 둘러보려고.”
“참, 너 언제 산티아고로 가는 길 걸을 거라고 했지?”
마음이 덜컹했다. 그러잖아도 다음 날이면 나흘째니까 이제 슬슬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당황할 필요 없어. 그냥 물어본 거야. 네가 하도 여기서 재미있게 보내는 것 같아서 더 있고 싶으면 더 있으라고 말하려고. 솔직히 바르셀로나에서 나흘이면 너무 짧은 시간이지.”
“정말? 그래도 돼?”
“당연하지. 사실 닉의 신신당부를 받아놓고도 그동안 내가 너무 바빠서 제대로 가이드 못 해준 것도 마음에 걸렸고... 내일은 금요일이니까 내가 제대로 된 바르셀로나의 밤을 보여줄게.”
“유후, 신난다!”
“그리고 가우디는 주말에 나랑 같이 보자.”
람블라스 거리의 입구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머리에 터번을 쓰고 콧수염을 기른 남자와 가족들, 특유의 티가 나는 패션 스타일을 하고 안짱다리걸음으로 길을 건너는 일본인 여자,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바르셀로나 사람들, 금발의 덩치도 키도 큰 북유럽 여행객들, 소프라노 코맹맹이로 귀에 착착 달라붙는 미국식 액센트로 떠들며 지나가는 한 무리의 십대들..... 저마다 기다란 고동색 그림자를 하나씩 달고 달리는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들의 그림자와 엇갈렸다.
만약 그림자로 실을 자아내 직물을 짜낸다면 어떤 질감과 패턴이 될까 상상하는데 낯선 것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알베르토.
언제 갈아입었는지 아침의 슈트 차림이 아니었다. 블랙진에 느슨한 라인의 브이넥 티셔츠를 입고 회색 비니를 썼다.
반나절이란 짧은 사이 자란 수염이 남성적으로 느껴졌다.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며 상체를 5도쯤 앞으로 기울이고 오른팔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입모양은 동글었다가 옆으로 퍼지며 벌어졌다.
나도 오른팔을 들어 흔들며 같은 입모양을 했다.
‘올라.’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두 손으로 어깨를 잡더니 오른쪽과 왼쪽 뺨에 쪽쪽 키스했다.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손가락으로 뭔가 가리키기에 따라가 봤더니 다들 누군가를 만나면 양쪽 뺨에 키스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아까부터 내 옆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다른 여자도 상대방 친구(여성)가 나타나자 똑같이 인사했다.
저쪽에서도, 길 건너에서도, 그때부터는 양쪽 뺨에 키스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눈에 보였다.
“내가 무례를 범한 게 아니란 걸 알겠지?”
장난기를 가득 머금고 웃음을 참는 저 표정이라니.
“참 내, 누가 뭐래?”
“가자.”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저녁은 식사와 함께 밤을 맞이했고 밤은 자꾸만 숫자를 더해가는 한 잔의 칵테일로 서서히 젖어 들어갔다.
알코올과 달콤한 액체에 잠긴 우리는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고 외치고(*video killed the radio star, buggles, 1980) 달콤한 꿈이 어떤 것들로 이루어졌는지 이야기(*sweet dreams(are made of this), eurythmics, 1983)하는 멜로디에 몸을 맡기고 흐느적거렸다.
이대로 흘러, 흘러 바다로도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밤이었다.
액체가 주는 몽환에서 벗어나 겨우 밖으로 나와 보니 파란 새벽이었다.
서로의 피로에 절은 눈을 바라보며 우리는 깔깔 웃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올라와 방으로 들어가 쓰러지려는데 알베르토의 손이 나를 당겼다.
“우리 같이 잘래?”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었나? 같이 자자고?”
“응, 물론 뭔가 하면 좋겠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너랑 나란히 잠들고 싶어.”
입을 꼭 다물고 가만히 남자의 눈을 들여다봤다. 이렇게 누군가의 눈을 응시한 것이 얼마 만인가. 나를 붙잡는 단단한 팔을 느껴본 것이 얼마 만인가. 따뜻한 알베르토의 숨이 느껴졌다. 까슬한 턱이 나의 턱에 닿았다. 부드럽고 뜨거운 입술이 내 입술 위로 포개졌다.
아득해진 나는 눈을 감았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