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愛, 로路, 소설小說
02 카미노 데 산티아고

_ 그림자를 잃어버리다

by Snoopyholic

10km 내에 우체국이 있는 마을이 없었기에 일정이 급한 소냐와 마이크를 먼저 보냈다.

나는 짐을 부치기 위해 우체국이 문을 열 때까지 혼자서 기다려야 했다.

다시 혼자 남겨졌다는 느낌에 서러움이 몰려왔다.

잠깐 알베르토에게 전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기도 하고 전화를 걸면 당장 그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만뒀다.

그러자 잊고 있던 제이미에 대한 추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함께 미국을 여행하던 그때에도 찾을 서류가 있어서 문 닫힌 우체국 앞에서 그곳이 열리길 기다렸더랬지.

그때는 더 추웠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도 그와 함께여서 괜찮았다.

춥다고 투덜거리면 따뜻하게 안아주고 지루하다고 입을 샐쭉거리면 갖가지 농담으로 끝내 나를 웃게 해준 그였다.

이런 사소한 추억까지 떠오르자 어느새 뜨거운 눈물 두 줄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뼛속까지 제이미가 그리웠다.

결혼까지 약속했던 우리가 왜 헤어져야 했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 가슴은 아직 이렇게 뜨거운데 그의 가슴은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식어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다시 진부한 괴로움의 쳇바퀴 위를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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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내 괴로움을 배가시키려고 결심했는지 물방울이 하나둘 얼굴 위로 살짝 차갑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얼굴에 내려오는 물방울이 늘어날수록 나는 더 섧게 울었다.

드문드문 나를 지나치는 스페인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무리 그래도 일단 시작된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제는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고 나는 문이 굳게 닫힌 우체국 건물에 배낭을 기대어 놓고 등을 건물에 밀착시켰다.

바람은 왜 그렇게 심하게 부는지 부치려고 넣어두었던 여분의 담요까지 둘러쓰고 건물의 시원찮은 처마 아래서 오들오들 떨었다.

눈물은 그쳤지만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괴로웠다.

정말 차라리 알베르토한테 돌아갈까?

아니다.

여장부가 칼을 뽑았으면 깍두기라도 썰어야지 이대로 돌아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정말 산티아고까지 가면 제이미와 헤어지며 생긴 나의 번뇌가 사라질 수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었으므로 무거운 배낭을 지고 하루에 20km를 걸으며 자신을 고문하기보다는 추억이라도 남게 되도록 즐겁게 여행을 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속삭이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천천히 우체국의 셔터가 열렸다.


나는 두 번째 상자를 산티아고 우체국으로 보냈다.

이미 10kg이나 되는 상자도 보내두었으니 어쩔 수 없이 다만 상자를 찾기 위해서라도 나는 산티아고로 가야만 한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고민 말고 열심히 걷자.

걷다보면 정말 내 괴로움이 눈 녹듯 사라질지도 모르잖아.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아름다운 북부 스페인의 풍경을 천천히 즐기는 셈이니 밑질 것도 없다.

다행이 내가 우체국을 나와 다시 배낭을 멜 즈음에는 비도 잦아들었다.

노란 화살표를 찾으러 마을로 돌아왔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도움을 청할 누군가가 있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대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종교적 의미가 강한 길이라 그런지 몰라도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성당을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성당 근처에서 노란 화살표나 조가비 문양을 발견하지 않을까 해서 일단 그쪽으로 가기로 했다.

샛길로 들어섰는지 골목이 점점 좁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맞게 가는 것인지 불안해서 견딜 수 없어질 무렵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림자를 잃어버렸구나.”

“응?”

“그림자를 찾고 있는 것 아니야?”

“무슨 말인지.......난 길을 잃어버렸는데.”

“봐, 네 그림자가 사라졌잖아.”


처음에는 갑자기 나타난 이 여자가 심한 스페인 억양의 영어로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그림자가 보이질 않았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껴있으니 오히려 그림자가 있으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늘을 봐. 이런 날씨에 그림자가 있으면 이상한 것 아니겠어?”

“조금만 기다려봐,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야.”


대체 무슨 마술을 부린 건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하늘에 조금씩 파란 부분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데, 당연히 태양 반대편 바닥에 붙어있어야 할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몸을 움직여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림자가 사라졌다!

“봐, 내 그림자는 지금 여기 있는데 네 그림잔 없잖아. 그렇다고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어. 그림자들은 가끔 이렇게 사라지기도 해.”

“그림자들이 어디로 가는데?”

“쉬러. 그림자들이 모이는 술집에 가는 거야.”

“에이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긴, 벌써 그림자가 사라지고 없는데. 그럼 어디에 있겠어? 그리고 지금 스페인은 시에스타 시간이야. 여행은 너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그림자야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무조건 너를 따라와야 한다고. 스페인의 그림자들은 주인들이 시에스타를 즐기는 동안 그 때만 문을 여는 술집에 모여 신세한탄도 하고 즐겁게 어울리지. 지금쯤 네 그림자는 다른 그림자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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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림자가 사라지는지 사라지지 않는지를 늘 지켜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림자는 빛이 있으면 늘 내 몸 어딘가에 붙어있는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이 공기에 늘 감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이번이 처음은 아닐 거야. 다만 내가 너에게 처음으로 이야기 해준 것뿐이야. 그림자들은 생각보다 영리해. 아무도 모를 때, 자신의 주인을 쫓아다니는 것에 너무 지치면 스르륵 사라져 시원한 음료수를 들이키고는 돌아와야 할 때 스르륵 다시 네게로 돌아오지. 물론 자주 그런 일이 생기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 길 위에서는 그런 일이 조금 자주 생길지도 몰라. 옛날부터 사람들이 강한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던 길이라 여기서는 네가 평소에 살다 온 세상과는 다른 에너지가 흐르거든.”

“하지만 난 드라큘라 백작 같은 존재에게나 그림자가 없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웃기는 미신에 지나지 않아. 너도 알잖아, 그는 단지 영국의 브램 스토커란 사람이 만들어낸 소설 속에 존재하는 인물일 뿐이란 걸. 그림자가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서 사람들이 신경 써서 생각하지 않을 뿐이야. 혹시 넌 없니? 그런 순간 있잖아, 네가 아무리 소중하고 사랑하는 존재라고 생각해도 그런 것에서 잠시 떨어져 있고 싶다는 순간. 이렇게 지내다가는 폭발할 지도 모르겠다고 느끼는 순간. 그런 때 그림자는 너로부터 사라지는 거야. 너를 너무 사랑하니까. 너와 계속 함께 있으려면 휴식이 필요한 거지.”


나는 어떻게 들으면 맞는 것 같기도 한 그녀의 이론을 들으며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 입 다물어. 그렇게 있으니까 꼭 바보 같아. 나중에 혹시라도 너처럼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을 찾으면 내가 해준 이야기를 해줘. 그러면 그들의 그림자가 훨씬 편하게 주인을 따라다닐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리고 너도 걱정하지 말고 산티아고를 향해 가도록 해.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그림자가 있어야 할 곳에 있을 테니.”


나는 화살표의 행방을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골목을 급하게 쫓아가 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렇게 찾았던 노란 화살표가 내 눈에 포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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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쪽으로 가면 되는구나.


그나저나 내 그림자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언제 다시 내게 돌아올까?

난생 처음으로 그림자를 잃어버렸음을 알게 된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 무엇보다 누가 이런 내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어쩌나 조금은 걱정이 됐다.

그나마 태양이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낮은 눈으로 혹시나 그림자가 돌아왔는지를 살피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척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며 화살표를 따라 걸었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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