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와인의 샘
얼마 후,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던 이상한 여자의 말대로 내 그림자는 돌아와 있었다.
혹시 그림자가 멋쩍어 하는지 보려고 했지만 전혀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림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묵묵히 그곳에, 존재해야 하는 위치에서 정확하게 나를 따랐다.
아까는 순식간에 구름이 껴서 그림자가 자연스레 사라진 틈을 타서 그 여자가 내게 이상한 말을 건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분명히 보지 않았던가, 햇살이 다시 내 머리위로 떨어지는 순간, 그녀의 그림자는 있어야 할 곳에 있고 나의 그림자는 단 1mm도 보이지 않았음을.
‘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나는 그저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 걷기로 했다. 분명 추가로 짐을 부쳤는데도 가방은 여전히 무거웠다.
더군다나 목이 마른데 내 물통은 비워진지 오래다.
어디 마실 물이 나오는 수도가 없나 두리번거리는 중에 ‘와인의 샘’라는 푯말을 봤다.
‘어라? 이제는 눈이 이상해졌나?’
고개를 좌우로 힘차게 저은 뒤 다시 그 푯말을 바라봤지만 그곳에 박힌 말은 그대로였다.
그러고 보니 이 길에 대해 조사하던 중에 돌리면 와인이 쏟아져 나오는 꼭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도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고 생각했는데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해서 배낭 무거운 것도 다 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좁은 길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지자 근사하게 장식된 벽에 두 개의 꼭지가 나타났다.
이른 시간 탓인지 흐린 날씨 탓인지 몰라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선 왼쪽 꼭지를 틀어봤더니 물이 나와서 갈증부터 해소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와인이 쏟아져 나온다는 오른쪽 꼭지로 다가가 적당한 세기로 손잡이를 쥐고 아주 천천히 압력을 가했다.
그러자 투명하고 검붉은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소량을 병에 담아 슬쩍 맛을 봤더니 틀림없는 레드와인이었다!
정말 차가운 레드와인이 손잡이를 돌리면 수도에서 물이 나오듯 콸콸 흘러나왔다.
이것이 웬 횡재인가! 정말 마법 같았다.
나의 물병이 투병하고 검붉은 액체로 채워질 무렵 다른 사람들이 도착했다.
모두들 내 병을 보더니 사실이었다며 손뼉을 치며 좋아하더니 가방에서 빈병을 꺼냈다.
“우린 운이 정말 좋은 거야.”
“응?”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는 여름에는 이 ‘와인의 샘’이 마르기도 한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들인 셈이지. 그러니 은총을 만끽하라고!”
가이드북을 들여다보니 이 근사한 기쁨을 산티아고를 향해 걸어가는 길 위의 순례자들에게 선사하는 주인공은 지역의 유명한 와인 양조장이었다.
사실 무언가 유서 깊으면서도 근사한 전설을 기대했는데 그냥 와인을 만드는 곳에서 베푸는 선의라니 약간 맥이 빠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기적적인 일이기도 했다.
요즘 세상에 그 어느 누가 이렇게 공짜로 와인을 전격적으로 제공한다는 말인가?
어쩌면 이들은 이곳에서 생산하는 와인이 오랜 세월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을 통과한 순례자들로부터 사랑받았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고 믿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순례자들에게 공짜 레드와인으로 돌려준다는 것이 나의 추측이었다.
어떤 의미이든 나에게 ‘와인의 샘’은 기적이자 기쁨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이곳에서 조금만 있어보면, 내가 말하는 기적의 의미를 금세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찾아오는 사람마다 진짜 그럴까 하고 의심스러운 얼굴로 꼭지의 손잡이를 돌리지만 그곳으로부터 레드와인이 쏟아지는 순간, 환호성과 함께 그들의 얼굴은 함박웃음으로 가득해지는 것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와인의 샘’을 떠난 지 한참 뒤에도 자꾸만 앞으로 그곳을 찾게 될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어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아마도 나 말고 이곳에서 다분히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와인의 샘’이라는 기적을 목격하고 경험한 다른 사람 역시 비슷한 현상을 경험했으리라 확신한다.
먼 옛날 옛적에는 예수가 잔칫집에서 와인이 떨어졌을 때 항아리에 든 물을 모조리 와인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해서 잔칫집의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는데 그 기적의 명맥이 이런 방법으로 예수의 제자 야곱이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며 나아간 길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기도 했다.
사실 요즘 사람들에게 있어 천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며 남긴 신비한 에너지로 가득한 순례자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받은 일이고, 예로부터 축복받은 일은 잔치를 벌여 축하했다.
예수도 와인 없는 잔치는 잔치가 아님을 알았기에 기적을 행해서 잔칫집의 와인이 떨어지지 않게 했을 터이고 이 길에서 ‘와인의 샘’을 채우는 누군가 역시 잔치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신비한 샘을 계속 채우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나는 이 흥겨운 잔치에 초대되어 와인의 기적을 몸소 체험하며 기꺼이 순례자의 길을 걷는 한 사람의 행복한 손님인 것이다.
배가 고파왔다.
해는 더 이상 얼굴을 디밀지 않았다.
길을 가며 어디 적당한 장소가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아랍 식의 건물이 눈에 띄었다.
스페인이 한때 아랍 쪽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어서 그 시절의 건물이 꽤 남아있다고 하던데 이것도 그 중 하나인 듯했다.
슬쩍 아치형의 입구 안쪽을 들여다보니 계단이 보이고 내리막 계단의 끝에는 물이 차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어쩌면 이 건물은 과거에 물을 저장하던 용도로 쓰이던 곳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이곳이라면 점심을 먹기에 완벽했다.
계단을 내려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무거운 배낭을 지고 걷느라 뜨거워진 발을 물에 담갔다.
생각보다 훨씬 차가운 수온에 놀랐지만 금세 싫지만은 않은 차가움에 익숙해졌다.
‘와인의 샘’에서 떠온 와인과 가방에서 준비해둔 빵, 햄, 치즈, 토마토를 꺼내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스위스아미 나이프로 능숙하게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비록 땀 냄새 폴폴 풍기는 옷을 입고 까맣게 탄 얼굴을 하고 있지만 혼자서 은밀하고 특별한 곳을 차지하고 와인까지 곁들여 점심을 먹는 기분이 근사했다.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더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찾아왔지만 고개를 흔들며 주책없는 잡념을 떨쳐냈다.
지금이야 날이 그리 덥지 않아서 그렇지 아마 한여름이었다면 이곳은 순례자들이 발이나 몸을 담그고 온몸을 괴롭히는 열기와 더위를 식히고 가는 고마운 곳이었겠지.
샌드위치를 다 먹고 슬슬 젖은 발을 말릴 무렵에는 다른 순례자들이 건물 안을 들여다보며 어딘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 언어로 무언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며 사진을 찍었다.
더위를 식힌 나의 발은 기분이 좋았는지 군소리 없이 다시 양말에 둘러싸이더니 좁고 냄새나는 신발 속으로 쏙 들어갔다.
나도 상쾌한 기분으로 순례자의 길로 돌아왔으나 이제는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아까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습습함이 공기를 통해 폐로 전해졌다.
이런, 방금까지 충만하던 상쾌함은 어디론가 달아나버리고 기가 팍 죽어서는 제발 비만은 뿌리지 말아달라고 하늘에 간절하게 부탁하며 무겁게 발걸음을 뗐다.
그러나 나의 간절함은 전혀 전해지지 않았는지 하늘에서 조금씩 머리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꽤 굵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빗속을 걷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이는 그만 걷고 휴식을 취하라는 일종의 계시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다음 알베르게에 무조건 자리를 잡고 쉬겠다는 결심을 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