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아름다운 약속
건물 규모에 비해 무거워 보이는 큰 나무 문이 굳게 닫힌 알베르게가 나타났다.
잔뜩 힘을 주어 문을 당겼는데 의외로 쉽게 열리는 바람에 뒤로 나자빠질 뻔한 걸 겨우 면했다.
둥근 얼굴에 둥근 안경을 쓰고 턱수염이 덥수룩한 오스피딸레로가 나를 반겼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내가 이곳에 오늘 머무는 첫 번째 순례자라며 환하게 웃었다.
날짜, 이름, 출신국가를 기록하고 순례자 신분증에 도장을 받았다.
나의 입실절차를 마친 그는 친절하게 이곳의 시설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사실 조리시설조차 없는 자그마한 공간이라 크게 설명할 것도 없었지만 그의 친절함은 비 때문에 조금은 먹구름이 끼었던 내 마음에 햇살을 비춰주었다.
침구가 있는 곳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랐다.
매트를 깔고 침낭을 올려놓는 것으로 자리 선점은 마무리.
비가 굵어지면 분명 이곳에 사람들이 더 올 것이라는 생각에 서둘러서 샤워도구를 챙겼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니 안정된 기분이 됐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싸고 나오니 3명쯤 되는 순례자가 이곳에서 머물기 위한 절차를 밟는 중이다.
슬쩍 문밖을 보니 빗방울이 굵어졌다.
배낭에서 일기장과 펜을 가져와서 테이블에 앉아 그간 있던 일을 차곡차곡 써내려가는 중에도 순례자들이 차례차례 도착했다.
그중 눈에 띄게 예쁜 여자가 보였다. 젊고 방금 빗물을 빨아들인 식물의 줄기마냥 생생한 그녀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끗 웃더니 내 곁에 와서 앉았다.
“안녕, 난 로라라고 해.”
“안녕, 난 세라야.”
“와, 일기장 좀 봐. 어디 나라 말이야? 무슨 말인지는 하나도 모르겠지만 할 말이 참 많나보네.”
“한글이라고 한국에서 쓰는 문자야. 그리고 이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다 이유가 있어서 오는 것 아니겠니!”
“그런가? 넌 왜 이 길을 걷는데?”
“마음에 상처가 있어.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이제는 그 상처가 지긋지긋해서 이 길을 걸으면 치유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 한번 와봤지. 넌?”
“난 약속 때문에 이 길을 걸어. 저쪽에 앉은 사람이 우리 엄마거든. 그런데 엄마가 얼마 전까지 암으로 많이 아프셨어. 꽤 심하다는 진단을 받아서 가족 모두 낙담한 상태였지.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아는 사람한테 스페인에 순례자의 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야.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에서 얼마나 많은 영감을 얻었는지, 마음의 위안을 얻었는지에 대해서 들은 엄마는 어느 날 나에게 만약 당신의 병이 치유되어 건강이 허락한다면 꼭 그 길을 걷고 싶다고 하셨고 난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엄마와 함께 그 길을 걷겠다고 약속했어. 너무 신기하게도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엄마의 상태는 급속하게 호전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완치상태야. 그래서 우리는 약속대로 함께 이 길을 걷게 된 거지.”
“정말 아름다운 사연이네. 멋지다. 그리고 어머니의 쾌유를 축하해.”
그녀의 어머니는 딸내미의 이야기를 흐뭇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 주고받는 눈빛에는 사랑과 신뢰가 가득했다.
너무나도 감동적인 약속 때문에 순례 길에 오른 모녀의 이야기와 든든하게 서로를 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한국의 엄마 생각이 나서 눈물이 핑 돌았다.
분명 내게도 저런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제이미와의 이별이 모든 것을 망쳤다.
한때 엄마에게 자랑스럽던 딸은 이제 누구에게도 함부로 이야기를 꺼낼 수 없는 부끄러운 딸로 전락했다.
나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낳아주신 부모님께 의도하지 않은 불효를 저지르고는 그에 대해 괴로워하며 이 모든 고통을 치유해보겠다고 산티아고로 향한 길을 걷는 것이다.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던 제이미를 향한 증오가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더니 눈물로 터져 나왔다.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울었다.
샹하이에 산다는 그에게 사고라도 일어나서 그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가 지금 사랑하는 누군가가 최대한 잔인한 방법으로 그의 사랑을 배신해서 그의 심장이 내 것이 그러했듯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을 받게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제이미와 이별한 지 1년도 넘은 지금, 그걸 극복해보겠다고 온 길 위에서 나의 그를 향한 증오라는 감정의 수위가 전혀 내려가지 않았을 깨닫는 이 순간이 나를 너무나도 참담하게 했다.
어쩌면 나는 과거라는 우리에 갇혀 쳇바퀴를 돌며 살아야하는 다람쥐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명백하게 그가 나를 예전처럼 사랑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를 이해하거나 용서함 없이 그저 증오하며 불행을 바랄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이 추해서 견딜 수 없었다.
격해진 감정을 걷잡을 수 없어 그냥 엉엉 울었다.
얼마간 울었을까.
분명 우는 소리가 바깥으로 다 들렸을 텐데 사람들이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는지 슬슬 걱정됐다.
심호흡을 하고 밖으로 나왔더니 로라와 그녀의 어머니가 탁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나왔네. 왜 그렇게 오래 걸렸어? 지금 밖에는 축제가 한창이야. 음악소리 들리지? 얼른 나가자!”
로라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의 사연은 묻지 않고 따뜻한 손으로 눅눅한 내 손을 잡고 나를 밖으로 이끌었다. 밖에는 동네 주민들로 구성된 악단이 신나게 음악을 울리며 행진 중이고 회색하늘과 대조적으로 어디선가 진한 주황색 햇살이 축제를 축복이라도 하듯 마을에 내리쬐고 있었다.
나머지 주민들은 저마다 음식과 술을 나누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거나 춤을 췄다. 어디선가 나타난 동네 청년이 내 손을 붙잡고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문득 나의 현실은 자꾸 나를 참담하게 하는 과거가 아니라 그 구성이 어설퍼서 더욱 신나는 동네 밴드의 음악과 진한 회색하늘, 성당의 겨자색 사암 벽을 비추는 오렌지 빛 햇살, 이국땅의 낯선 남자의 손에 이끌려 춤을 추는 나, 축제를 즐기는 모든 사람들이 있는 이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망상에 사로잡혀 울던 나를 부정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의 현재에는 과거 이상의 것들이 공존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설사 내게 다시 과거 때문에 괴로워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그건 단지 뒤를 돌아보며 되새김질하는 과정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괴롭히는 과거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이상, 나에게는 반드시 희망이 함께한다.
과거로부터 드리워진 비참함의 그늘 속에만 있기에는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축제들이 견딜 수 없이 흥겹지 않은가!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