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Bar Siesta
이틀 정도를 혼자서 걸었다.
물론 가끔 지나치며 인사를 건네며 짧은 시간을 함께 걷게 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내 속도로 걷는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속도에 맞추어 걸을 의지가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수많은 포도밭과 올리브 농장을 지났다.
무심하게 파란 하늘에는 UFO를 닮은 구름이 혼자 무거운 배낭을 지고 걸어가는 나를 내려다봤다.
차라리 저 구름이 정말 UFO라면 좋겠다. 그래서 나를 이상한 길 위로 모여드는 사람의 샘플로 납치해서 이것저것 조사한 뒤에 산티아고에 놓아주는 것이다. 그럼 나는 외계인이 정말 미국 드라마 엑스파일에서 수없이 본 둥글고 큰 머리에 회색피부와 초록색 피를 가진 존재인지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어디 그 뿐인가? 산티아고에 곧 도착할 테니 힘들게 내 죄 값이라는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긴 길을 걸을 필요도 없다.
혹시나 하고 다시 구름을 올려다보지만 구름은 여전히 UFO의 모습을 하고 유유히 파란 하늘을 떠다닐 뿐이었다.
아, 이게 웬 정신 나간 생각이람?
어쩌면 혼자서 너무 오래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지금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두뇌가 과열된 것인지도.
원인이 무엇이든 나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 양 옆으로 보이는 풍경은 넓게 펼쳐진 마른 초원과 그곳을 쓸쓸하게 지키는 나무 한그루 정도일 뿐 마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북을 꺼내보니 3km는 더 걸어야 마을이 나타난다고 적혀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다.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반경 200m 내에 전혀 감지할 수 없으니.
침묵의 45분 뒤에 마을이 나타났지만 이곳은 마치 유령도시 같았다.
고풍스러운 멋이 느껴진다거나 마을 사람들의 아기자기함이 돋보인다거나 하는 면이 전혀 없었다.
건물들은 모두 어떤 매력도 없이 마구잡이로 들어서서는 귀찮게 굴지 말고 어서 통과하라고 강요하는 것만 같았다.
문을 연 가게나 바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은 전혀 안 보였다.
이게 알베르토가 말한 시에스타구나.
가게도 모두 문을 닫는다는.
마을의 끝에 닿을 즈음에 벤치와 급수대가 나타나서 잠시 그곳에 앉아 쉬기로 했지만 그늘 한 뼘 없는 그곳에서의 휴식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는 외로움과 서글픔이 밀려왔다.
이제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이 길을 끝내 걸으려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정말 이 길의 끝에서 나는 내가 갈구해온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그렇게도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조차 나를 버리고 떠나버린 이 마당에 나는 괜찮을 수 있을까?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여기에 앉아있을 수는 없어서 다시 가방을 메려는데 어디선가 커피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오직 후각에 의존해서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자꾸 노란색 화살표가 이끄는 길에서는 멀어졌지만 잠시라도 시원한 곳에 앉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Bar Siesta
꼭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아주 엉성한 간판이 아무렇게나 문 앞에 놓여있고 안에서 커피향이 흘러나왔다. 무언가 웅성거리는 소리와 스페인어 노래, 잔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바로 이런 곳이 필요했어!
기쁜 마음으로 판자문을 열었다.
성큼 안쪽으로 발을 디뎠지만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분명 냄새와 소리가 존재하지만 이곳엔 검은 형체들만 보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이 정지라도 된 듯 귓속으로는 윙 소리만 들린다.
나는 이제 뒤 돌아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지 아니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볼 것인지를 정해야만 한다.
단순히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머물기엔 나에게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최대한 조용히 나가기로 결정했다.
천천히 몸을 틀고 팔을 뻗어 문을 열려는 순간, 어느새 다가온 검은 형체 하나가 내 팔을 붙잡았다.
“궁금하지 않아? 이리 와서 한잔해.”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를 가진 검은 물체가 나를 바 쪽으로 이끌었다. 평소라면 기겁하고 소리를 질렀을 텐데 참 이상하게 나를 이끄는 손길이 익숙해서 최면 걸린 사람처럼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뭐 마실래? 이런 순간엔 시원한 맥주 그림자가 좋겠지? 난 압셍트 그림자.”
“너 뭐야?”
“난 네 그림자야. 그리고 여긴 그림자들이 쉬어가는 곳이지. 그런 곳이 있을 거라는 건 그때 여자의 말을 듣고 짐작할 수 있었지?”
“응. 어딘가 가는 곳이 있으리라고 짐작은 했지. 그런데 그림자들이 쉬는 곳에 내가 끼어도 되는 거야?”
바텐더 그림자로 보이는 검은 형체가 내게는 연갈색의 맥주 그림자를, 그림자에게는 노랗고 투명한 압셍트 그림자를 가져왔다. 이런 걸 어떻게 마시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더니 그림자가 마시는 시늉을 하며 마셔보라고 권했다. 의외로 시원한 맥주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어서 깜짝 놀랐다.
“원칙적으로는 금지된 일이지만, 얼마 전에 네가 내가 사라진 걸 발견했잖아. 진실을 아는 사람들에 한해서 극도로 한정된 장소로 그림자가 대칭자아를 데리고 올 수 있어. 그리고 그 공간에서만 대칭자아와 소통하는 것이 가능하지. 다른 곳에서는 엄격하게 소통이 금지되어있어. 평소에 그림자는 단지 빛의 반대편의 표면에 생기는 검은 형상일 뿐인 거지. 아무튼 난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와 함께하는 존재야.”
“그렇구나. 정말 신기하다! 그럼 이곳의 모든 그림자들의 대칭자아는 지금 그림자가 없는 거네?”
“응. 대개는 스페인 사람들의 그림자들이야. 너도 알지? 지금 이 시간이 시에스타 시간인거. 그래서 스페인이나 이태리에선 대부분 시에스타 시간에만 문을 여는 곳이 많아.”
“그럼 다른 나라에서는?”
“너도 알다시피 세상이 점차 바빠지고 있잖아. 고도성장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많은 나라에서 점점 그림자를 위한 휴식공간이 사라지는 추세야.”
“그나저나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우선은 네게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네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야.”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응. 그게 몇 가지 있는데, 제일 먼저, 나를 부러워하지 마.”
“뭐?”
“뭐긴, 너 자주 땅에 드리워진 내 모습을 보면서 부러워하잖아. 나만큼 날씬하고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잖아. 하지만 생각해봐, 대개 네가 나를 부러워하는 때는 내가 길어졌을 때인데 만약 네 키가 2~5m 정도라면 도대체 어떤 남자가 너를 사랑하겠니? 사람들도 너를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피해 다닐 거라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너는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뻐.”
“하하, 알고 있었구나! 내가 너 많이 부러워하는 거.”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이제 그만 좀 괴로워해. 1년 넘게 떠난 제이미인가 뭔가 하는 작자 때문에 울고 한숨 쉬고 괴로워하고. 네가 너무 아파하는데 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 네 어깨 두드려주며 네 손 잡아주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내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다고. 그러니까 네가 슬프고 힘들 땐 나도 똑같이 고통스럽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나도 알아. 속상해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뿐이니 미안해하지 마. 난 다만 우리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모든 사람들이 너를 떠나도 나만은 늘 너와 함께라는 걸 잊지 말아줘.”
“피, 이렇게 가끔씩은 그림자들과 어울려서 놀면서?”
“야, 그건 정말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라고! 물론 이 신비한 길에는 그림자의 휴식을 위한 바들이 다른 곳에 비해서 많은 편이긴 하지만. 어쨌든 너, 그림자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네가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무덤에 묻히는 순간까지, 심지어 화장해서 뼛가루를 어딘가에 뿌리지 않는 이상 네 육신이 다 썩어 없어져도 나는 네 뼈와 함께 잠들게 돼.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영원이라는 시간동안 너란 아이를 바라만 보고 함께해야만 하는 신세라고. 그런데 내가 어쩌다 한 번씩 너 모르게 짬짬이 즐긴다고 해서 나무라면 나 서운하다.”
기분이 상했는지 그림자는 연신 압셍트 그림자를 들이켰다.
그러더니, 조금 뒤에 바 쪽으로 푹 쓰러졌다.
나는 깜짝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다른 그림자들이 나와 내 그림자를 위층의 방으로 안내했다.
침대에 그림자를 눕히고 나도 그 옆으로 누웠다.
문득 그림자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태껏 나라는 존재를 아무 불평 없이 묵묵하게 견뎌준 나의 대칭자아.
그러고 보면 그림자는 언제나 나와 함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고맙다고 생각한 일은 없었다.
공기처럼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던 존재. 고맙다고 속삭이며 잠든 그림자를 꼭 안아주었다.
그렇게 누워있자니 나에게도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 뒤로는 살금살금 잠의 요정도 함께이다.
살얼음처럼 얇게 잠들었을 즈음 생각했다. 참 희한한 하루였다고.
눈을 떠보니 나는 아까처럼 황량한 마을의 급수대 옆의 옆 벤치에 앉아 졸고 있었다.
깜짝 놀라 둘러보니 어느새 나타난 평범한 마을사람들과 순례자들이 섞여 휴식 중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을에 바 시에스타라는 곳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예전에 있었는데 문 닫은 지 오래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잠도 덜 깨긴 했지만 더욱 어리둥절해서 배낭을 메려는 나에게 마을 사람 중 하나가 능숙한 영어로 흥미로운 꿈을 꿨나보다며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혹시 그게 그림자 꿈이었다면 그림자의 말을 잊지 말라는 묘한 말을 했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