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바람이 많이 분다. 아직 어두운 풍경은 조금 무서울 정도다. 점퍼 모자를 뒤집어쓰고 바람 가득한 풍경 속으로 걸어 나갔다. 찬 기운이 몸을 감싼다. 난 나오자마자 도로 들어갈까 하고 생각했다. 새벽 운동은 날씨 좋은 날로 미루시는 게? 속삭이는 마음 속 소리를 들었지만 무시했다. 공원으로 나가 달렸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추운 날 뭐하는 짓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점퍼 모자가 귀에 닿아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오늘은 사람도 한명 없다. 잘 달리다가 요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둠 속에 나무가 흔들린다. 저 멀리서 바람에 뭔가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왜 이래? 공원을 한 바퀴쯤 달리고 출발 장소에 닿았을 때 다시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회초리가 허공을 가르는 것 같은 째지는 소리를 듣고 나뒹구는 검은 비닐봉지가 춤추는 걸 목격했다. 난 전속력으로 집을 향해 달려갔다. 조금 무섭다는 말은 취소다. 너무, 무섭다.
안락한 집에 돌아와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고 면도를 했다. 원래 쉬는 날은 면도 따윈 하지 않는다. 털보가 되어도 상관없어서가 아니다. 쉬는 날은 그냥 편하게 쉬고 싶어서다. 하지만 이제부터 쉬는 날에도 평소와 같이 면도하기로 했다. 쉰다고 아무렇게나 널 부러지니 마음도 널 부러지는 것 같아 약간의 상징적 긴장감을 갖기 위해서. 상쾌하게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직 잠든 아내를 위해 수면등 하나만 켰다. 지난 주 사놓은 책을 뒤적거리며 두 페이지쯤 읽고 컴퓨터로 일기를 쓴다. 아니 일기가 아니라 그냥 글을 쓴다고 하자. 있었던 일을 적는 게 아니라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막 쓰는 글. 어디 누구에게 보여줬다간 미를 친 놈이라는 소릴 들을만한 그런 글이다. 아무튼 그렇게 막 돼먹은 글을 막 쓰고 있는데 갑자기 오싹한 기운이 감돈다. 어깨 위로 갑자기 손이 하나 올라온다.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니 아내가 어둠 속에서 눈을 비비고 서 있다. 뭐라고 중얼거리곤 화장실로 갔다. 난 솟아오른 닭살을 정리하느라 오두방정을 잠시 떨고 냉수를 한잔 마셨다. 돌아온 아내는 다시 잠이 들었고 난 막 돼먹은 글쓰기를 계속 했다. 얼마 후 글쓰기를 끝내고 인터넷 세계로 접속했다.
브런치에서 작가의 포스를 깨우라고 한다. 깨우고 싶다. 정말로. 당최 일어날 기색이 안 보인다는 게 문제지만. 그렇게 브런치북 프로젝트를 살펴보다 지난 프로젝트 수상자들을 살펴보았다. 그 분들의 글을 읽으며 역시 상 받을 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들 대단하다. 그러다 어떤 분의 에세이를 읽었는데 다시 소름이 돋았다. 아,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할까 싶은 글을 발견했다. 정말 그분이라 불러도 아깝지 않을 감각적인 글이다. (물론 내 눈에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람마다 보는 눈은 다르니 누군지 묻지는 마시라) 모니터 속으로 들어갈 것처럼 빠져서 그분의 글 몇 편을 계속 읽었다. 난 왜 저렇게 못 쓰는 걸까하는 열등감도 느껴보고 저렇게 쓰려면 어찌해야 하는 가 고민도 해보았다. ‘난 나만의 방식이 있는 거야’라며 위로도 해보고 그분을 외계인 취급도 잠시 했다.
그렇게 글을 요리 저리 뜯어보다 한 가지 느낀 게 있다. 그건 바로 ‘솔직함’이었다. 글쓰기도 기술이고 어떤 식으로든 훈련은 필요하다. 기술적인 부분과 훈련의 방법은 이미 많은 글쓰기 책에 나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화려한 껍데기가 아니라 내면에서 토한 알맹이다. 그 알맹이의 근원은 마음속에서 일어난 변화 아닌가. 그 변화를 잘 꼬집어 밖으로 드러낼 때 글쓴이와 읽는 이의 마음이 닿는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 변화를 어떻게 꼬집는가? 솔직함이라는 집게로 거침없이 집어낸다. 허나 문제는 두려움이다. 이런 글을 써서 어디에 쓰나? 누가 보고 욕하면 어쩌지? 이 따위도 글인가?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린다. 그러면 갑자기 자신감이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전체 선택 후 삭제 버튼을 누르게 된다. 이건 오늘 새벽 나의 모습과 같다. 공원에서 의욕적으로 달리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바람 한번 세차게 불고 검은 봉지가 춤추는 걸 목격하면 쌩하니 집으로 달려가 버리는 것과 같은 꼴이다.
내가 누구에게 보여주지도 않을 글을 매일 쓰는 것. 난 그 시간이 좋다.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쓴다. 누가 보지 않으니 이렇게 마음 편하다. 조금도 쉬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편하게 써 내려가니 좋기만 하다. 난 이 시간이 사랑스럽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두려움. 그 반응을 살피는 이상한 긴장감. 이 두 가지는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지고, 너무 잘 쓰려고 하니 더 안 써지는 악순환으로 종결된다. 그러니 결국 난 '나만 보는 글쓰기'는 즐겁고 자유롭게 하면서, '누가 보는 글쓰기'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하는 것이다. 이런 이중성이 반복되면 자연스레 즐겁고 자유로운 '나만 보는 글쓰기' 쪽으로 향하게 되고 누가 어깨에 손만 올려도 놀라게 된다. 닭살은 보너스.
이 시점에서 나에게는 혜민스님의 깨달음이 좋은 힌트가 되었다. 혜민스님의 유명한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 세가지를 깨닫는 순간,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지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내가 상상하는 것만큼 세상 사람들은 나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사람은 제각기 자기 생각만 하기에도 바쁩니다. 남 걱정이나 비판도 사실 알고 보면 잠시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줄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내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데, 어떻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줄 수 있을까요?
셋째, 남을 위한다면서 하는 거의 모든 행위들은 사실 나를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내 가족이 잘되기를 바라는 기도도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가족이 있어서 따뜻한 나를 위한 것이고,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우는 것도 결국 외롭게 된 내 처지가 슬퍼서 우는 것입니다.
난 아마 내일도 글을 쓰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혜민스님이 말한 이 세 가지 깨달음이 내 마음을 조금 편안하게 녹여준 것만은 틀림없다. 누구나 글을 쓰면서 자기 검열하기 마련이지만 그 정도를 조금 느슨하게 할 때 나다운 글이 태어날 것이다. 반응을 두려워할 필요없다. 그들을 위한다는 부담감마저도 내려놓자. 내가 좋아하는 방법은 단번에 써내려가는 것이다. 그리곤 한동안 뒤돌아보지 않다가 고치든지 말든지 결정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 글을 쓰고 그 과정에서 얻은 행복으로 인생을 즐기자. 혜민스님 말대로 내가 행복해지면 세상도 행복해질 것이기에.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란다. 또한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대할 때 불편함을 느끼거나 하고 싶은 일을 망설일 때 떠올려보면 어떨까 싶다.
두려움을 넘어 솔직함으로.
우리,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