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앉아 있다. 아메리카노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아직은 아니다. 너무 뜨거워서 그냥 마셨다간 입천장이 홀라당 벗겨질 것이다. 갓 나온 커피의 뜨거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녀석이 식길 기다린다. 아무 생각 없이 뭔가를 기다릴 때 나는 멍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예민해진다. 예민하다는 말, 사전을 찾아보면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는 뜻이다. 나는 빠르고 뛰어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가끔 무엇인가를 느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주변을 관찰하고 분위기를 자주 살핀다. 가끔 남의 말을 엿 듣기도 하는데 일부러 그런 다기 보다는 그냥 들리는 것에 괜히 집중하는 편이다. 예민하게 여행하며 난 이미 온 동네를 멍하니 엿 들었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뒤쪽으로 두 자리 너머에 남자와 여자가 마주 앉아 있다. 등지고 있어 어떤 모습인지 자세히 알 순 없지만 둘의 대화는 소개팅이나 선을 보러 나온 남녀의 대화다. 그 여자는 수다스럽다. 여행을 가면 사진을 찍는 게 취미라는 그 여자는 지난 번 여행에서 1000장이 넘는 사진을 찍고 왔다고 자랑한다. 남자는 조금 어리숙한 말투로 그 여자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남자도 사진 찍는 게 취미라고 말한다. 그 여자는 정말이냐며 놀란다. 그럼 좋은 카메라 쓰시겠네요? 하고 묻는다. 당황한 남자는 그냥 휴대폰으로 사진 찍는 게 취미라고 말하며 미안해한다. 여자는 아 그러시구나 하고는 다시 하던 말을 계속한다.
길고 긴 그 말의 요지는 친구랑 함께 간 이번 여행에서 사진을 엄청 찍었고 아주 즐거웠다는 것이다. 여자는 그 기나긴 이야기의 폭풍으로 남자를 시험하는 듯하다. 맞장구치며 반응하던 남자는 이제 지쳤다. 바람처럼 자신을 통과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듣고만 있다. 일본 어디서 맛있는 걸 먹고 셀카도 찍었는데 인생 사진을 건졌다는 그 여자는 친구가 자신을 예쁘게 찍어준 것에 대한 감격을 끝없이 늘어놓았다. 한편의 오페라 공연 같은 이야기가 끝나고 적막이 찾아왔다. 여자의 말이 끝나니 더 이상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적막감에 잠시 당황하더니 화장실로 향했고 여자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화장실에서 돌아와 커피를 홀짝이는 남자와 전화 하는 여자. 그 둘은 10분쯤 그런 상태였고 전화가 끝난 후 5분 정도 적막감 속에 커피만 홀짝이다 일어났다. 나의 뒷자리는 이제 조용하다. 물론 저 멀리 아직도 온갖 말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스피커에선 노래가 흘러나온다. 누군가의 웃음소리, 커지는 목소리, 쿵쿵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 어지럽게 흩어지는 그 소리들이 다가온다. 그 소리들은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냥 오고 간다.
이제 커피는 식었다. 딱 마시기 좋은 온도가 된 그 녀석을 들여다본다. 시커먼 액체가 흔들리고 그 안에 내가 비친다. 이 공간을 떠난 그 여자의 여행을 떠올려본다. 빠른 속도로 스쳐지나간 그 여행은 어쩐지 슬펐다. 계속 말해야만 하는 의무감에 쫓긴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바람처럼 지나간 그 여행은 내용과 상관없이 서글펐다. 그 여행에 결을 맞추지 못하고 뒤꽁무니만 쳐다본 남자는 어땠을까? 그 여자의 슬픈 여행은 그녀의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남자는 그녀의 무언가가 합당치 않음을 느꼈다. 어긋난 만남의 표식으로 그는 침묵을 택했다. 그의 침묵과 그녀의 침묵이 닿자 자신이 저지른 침묵이 드러났다. 죄책감이 그를 화장실로 이끌고, 그녀의 병은 또 누군가에게 닿아 합당치 않게 이어졌다.
이제 적막이 흐른다. 밤이 오고 소리들이 사라졌다. 텅 빈 카페는 그 날을 가득 채운 수많은 이야기의 내용물을 머금었다. 빈 커피 잔에는 그 내용물의 얼룩이 남아 내 곁에 놓여 있다. 앉아서 여행을 생각하는 이 모순의 끝에는 딱 맞지 않았던 그 만남의 여운이 기다린다. 여운으로 우린 떠나고 떠난 자리의 여운이 또 누군가를 떠나게 한다. 떠나는 목적은 달라도 그들이 닿는 곳은 결국 하나다. 아무렇게나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것. 무엇이 중요하고, 어떤 일이 나를 살아있게 하는지 확실히 알아채는 것. 사랑하고 싶다는 것. 결국 '나'라는 진실과 마주치는 그 묘한 몸짓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결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