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빠져나온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활활 불타는 마을이었다. 마을에 있는 모든 건물에 불이 붙어 있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인재는 모든 사람이 다 밖으로 나온 것을 확인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준수가 다가와 묻는다.
“인재씨, 저기 갇혀 있던 건 저희가 다인가요?”
“네, 여기 계신 14명….”
“…….”
“…….”
인재는 밖으로 나왔는데도 영래가 안 보여 아직 저 안에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끝낼 때가 되었다는 말이 막 떠오른다. 이걸 그냥 뒀다가 나중에 민정이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상상하면 아찔하다. 인재는 몸을 움직여 다시 그 지하 벙커로 뛰어 들어갔다. 아까 그 커다란 돔 형태의 공간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는데 당연히 탈출할 땐 위로 올라왔다. 영래가 밖으로 나온 게 아니라면 아래로 내려갔을 게 분명했다.
계단은 생각보다 길었다. 지하에 있는 벙커에서 더 지하로 내려가는 그 계단을 거의 10분 넘게 내려갔더니 철문이 하나 나왔고, 그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문틈 사이로 환한 빛이 새어 나온다. 인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괴로워하는 영래가 보였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괴물로 변신할 것 같은 모습이다.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용기 내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으….”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가! 빨리!”
영래의 갑작스러운 호통에 놀라긴 했지만 이대로 두고 갈 순 없었다. 어떻게든 데리고 나가야 했다.
“같이 나가요!”
“가라니까! 제발!”
“빨리 밖으로 나가셔야 해요!”
“으….”
영래는 갑자기 품속에서 회 뜰 때 쓰는 칼을 꺼내 들었다. 어디서 그런 살벌한 칼을 구했는지는 몰라도 꺼내는 순간 위협이 느껴질 만한 칼이었다. 영래는 그 칼을 자기 목으로 천천히 가져갔다. 영래의 행동에 깜짝 놀란 인재는 얼른 달려들어 그 칼을 뺏기 위해 매달렸다. 영래는 칼로 자기 목을 그으려 하고, 인재는 그걸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갑자기 영래의 손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힘이 빠지는 걸 느낀 인재는 얼른 칼을 빼앗았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흐흐, 제정신 아닌 거 몰랐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영래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뭔가 독기가 서려 있다. 목소리에서조차 그 살벌한 기운이 느껴졌다. 달라진 영래는 이제 인재 따위에겐 관심도 없다는 듯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특이하게 그 방의 한쪽 벽면은 통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유리 너머로 어떤 거대한 장치 같은 게 보였다. 워낙 커서 장치의 일부분만 보였지만 그냥 언뜻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다.
다른 한쪽 벽면은 그 장치와 연결된 듯한 이상한 버튼들이 가득했다. 영래는 그 버튼들을 능숙하게 누르더니 뒤돌아 인재를 쳐다봤다. 마치 조커 같은 표정으로 레버를 당겼다. 그랬더니 방의 다른 한쪽 문에서 하얀색 빛이 새어 나왔다. 영래는 그 문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인재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저기…. 이봐요….”
“가만히 있어.”
“예?”
“귀찮게 하지 말라고!”
“…….”
“또 볼지도 모르겠군.”
영래는 빛이 새어 나오는 문을 열었다. 하얀빛이 너무 강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영래는 그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이내 사라졌다. 빛이 사그라들고 인재가 그 문 쪽으로 다가가니 문은 없어져 버렸다. 인재는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계속 그렇게 있을 순 없었다. 얼른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어찌나 정신없이 뛰어 올라갔던지 자기 손에 그 칼이 쥐어져 있는지도 몰랐다.
벙커 입구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한 손에 칼을 들고 나타난 인재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인재는 얼른 칼을 버렸고, 그들을 향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소설가들은 돌아왔다. 마을은 완전히 불타버렸다. 그 바람에 모두 서재로 옮겨와 작업하게 되었지만, 어찌 됐든 알 수 없는 평화가 찾아왔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민정은 할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읽고 일주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인재는 그런 민정이를 옆에서 지켜보았다. 아직 영래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던 서재의 지하실엔 가 보지 않았다. 민정이 마음을 추스르면, 함께 내려가 볼 생각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