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쪽 직장인도 우쭈쭈가 필요해
나름 건강도 챙기고 인간관계도 관리하면서 회사를 성실하게 다녀도 쌓이는 게 있다. 보상심리다. 이놈은 도대체 어디에 쌓이는지 모르겠다. 마음 한 구석일까 뇌의 일부분일까. 혹시 불뚝 나온 똥배의 이유가 이건가. 어쩐지 일이 많을 때는 더 나온다 싶더라니.
도대체 보상심리는 왜 생기는 걸까? 뭔가를 많이 참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노동을 하는 시간 동안 생각보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참는다. 매일매일 8시간 이상 타인과 함께 생활하는 성인이라면 당연하다. 성인은 복잡한 존재다. 평일에는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주말이 되면 집에 쭉 늘어져 짱구 레고를 한다. 씻고 나오는 엄마를 놀라게 하려고 화장실 문 앞에 잠적한다. 여전히 장난기도 많고 한없이 게을러질 수도 더러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성인이기에 사람이 많은 일터에서는 이 모든 걸 숨긴다. 무언가를 참고 숨기면 보상심리가 생긴다.
회사에서 시키는 일은 대부분 '이걸 내가 할 수 있다고?'의 성질머리들을 갖고 있다. 하라니까 일단 하는데 하다 보면 욕심이 생겨서 또 꾸역꾸역 해낸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참는다. 귀차니즘, 눕고 싶은 욕구, 낮잠과의 사투, 술병, 심리적 허기, 생리현상, 갓 시작한 핑크빛 사랑 등등. 업무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보상심리도 커진다. 뭔가를 참느라 투쟁하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야근이 많은 직장인들이 폭주하는 이유도 보상심리와 맞닿아있다. 술을 왕창 먹거나, 쇼핑을 잔뜩 하거나. 돈과 시간을 쓰지 못해 안달 난다. 술병 때문에 다음 날 1차 현타가 온다. 똥배의 원천이다. 술값 옷값 택시비 때문에 다음 달 2차 현타가 온다. 작고 귀여운 월급으로 우리는 보상심리까지 다스려야 한다. 미디어만 보면 직장인 평균 연봉이 5천쯤 되어 보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대한민국 직장인의 중위소득은 월급 300만 원이 안 된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율을 끌어올려야 한다.
보상심리를 다스리는 가장 저렴한 방법은 정시 출퇴근을 하는 것이다. 유연근무제이든, 시차출근제이든, 주 4일 혹은 4.5일 근무든, 최대한 회사와 내가 근로계약서 상에 쓴 시간 동안만 노동을 하자는 것이다. 야근을 도저히 안 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그게 너무 힘들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섰다면 이직을 추천한다. 보상심리가 충분히 해결 가능하고 초과근무가 자신에게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당연히 이 글을 읽을 필요도 없다. 내장 어딘가에 쌓이는 보상심리가 느껴지고 그 보상심리로 인해 뭔가 불편함을 느낀다면 정시 출퇴근을 권한다. 억울함이 드라마틱하게 사라진다.
정시 퇴근만으로도 저녁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어도 오늘 당장 치울 시간이 생긴다. 가족들과 담소를 나눌 수도 있고, 친구와 애인을 만날 수도 있다. 30분 만이라도 저녁 산책을 갈 수도 있고 책을 읽고 글을 쓸 수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원하는 것 하나쯤은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그 시간이 짧든 길든 생긴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왜? 우리는 회사에서 많은 것을 참았다. 잠을 자는 것 이외에 나에게 허락된 자유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 주말이 설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2일은 너무 적다.
정시 퇴근은 그렇다 치고 정시 출근 또한 중요한 이유는, 안타깝게도 많은 회사가 개인적인 출퇴근 시간을 존중하는 문화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존중하는 회사에서는 굳이 정시 출근을 할 필요가 없다. 올대리의 경우 바람직한 문화가 정착된 회사에 다닐 때에는 30분 정도 일찍 출근해 항상 책을 읽었다. 캄다운되는 느낌도 좋았고 주로 카피라이팅을 했기 때문에 표현법들도 쏠쏠하게 캐치했다. 하지만 어떤 회사들은 시간과 관계없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업무 이야기를 시작한다. 급한 건이라면 커피를 떠 올 틈도 없이 바로 업무를 시작해야 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개인의 노동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출근은 빨리, 퇴근은 늦게' 공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늘 20~30분씩 일찍 출근하고, 정시 퇴근을 하는 팀원이 있었다. 어느 날 지하철 이슈로 5분 지각했는데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5분 늦게 출근했으니 양심껏 5분 늦게 퇴근하세요." 진짠지 농담인지 분간이 안 가는 억양이었다. 아마도 진심이 80% 이상이었겠지. 많은 회사가 사원들의 출근 시간은 옥죄면서 퇴근 시간은 느슨하게 둔다. 조근 수당은 아직 없다. 슬픈 말이지만, 조근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이런 회사에서 보상심리는 더 빠른 속도로 쌓인다.
나는 콘텐츠 기획자다. 기획자들마다 업무 스타일이 달라 야근하는 사람은 엄청 야근하고, 안 하는 사람은 또 안 한다. 나는 아침형 인간인지라 어두워지면 집중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정시퇴근을 선호한다. 같은 일이라도 초과근무를 하면 시간이 2배 정도 더 걸린다. 데일리 업무보다 프로젝트성 업무가 많아 투두리스트나 스케줄의 변동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런데도 야근을 하지 않는 첫 번째 기술은 수시로 스케줄을 변경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스케줄 조정이 많이 필요하다. 정해진 시간 내에 업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마감 날짜를 바꿀 수 있는 일들을 재빠르게 선별해 허락을 구한다. 우선순위가 헷갈리는 업무들은 팀장에게 물어 스케줄을 바로바로 조율한다. 집중 타임 30분이 끝나면 바로 스케줄을 체크하는 게 습관이 됐다. 스케줄을 중간중간 체크하면 팀장에게 중간보고를 할 때에도 유용하다. 안 되는 걸 밤새서 부여잡고 있지 않는다. 대강이라도 끝내놓고 다음날 기획안을 봤을 때 오히려 발효가 돼서 좋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해진다.
마음의 퇴근 시간을 정하는 건 정시퇴근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시간 안에 끝내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른다. 6시까지 무조건 끝내겠어가 아니라 5시 50분까지 끝내겠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6시에 집에 갈 수 있다. 퇴근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인투식스라면 5시 50분이 내 마음의 퇴근 시간일 것이다. 출근 준비를 하는 것처럼 퇴근 준비도 필수다. 보통 10분 정도를 쓴다. 오늘 어떤 일을 했는지, 곧 마감인 업무는 어느 정도 끝냈는지, 내일 오전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이번 주 중에 누구에게 뭘 물어봐야 하는지 등을 확인한다. 그래야 내일의 내가 착오 없이 업무 모드로 전환된다. 내일의 정시퇴근에도 영향을 미친다.
신입사원이 완벽주의를 내려놓기란 쉽지 않은데 예 제가 바로 그 신입사원이었습니다. 콘텐츠 기획자이기 때문에 완벽에 완벽을 가할 수밖에 없다. 레퍼런스를 조금만 더 찾으면 더 굉장한 게 나올 것만 같고, 여기서 조금만 더 수정하면 걸작이 탄생할 것 같고, 카피를 더 다듬으면 누가 썼냐고 소문이 날 것만 같았다. 문제는 이거 하나만 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업무는 좀비와 비슷해서 늘어나면 늘어났지 좀처럼 줄지 않는다. 어떤 회사를 가도 마찬가지다. 할 일의 이름은 산더미요 특징은 끝이 없다.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 콘텐츠를 만들든,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중요한 건 내가 어디서 멈출 수 있을지를 정하는 것이다. 완벽한 작업물을 짠 하고 보여주는 서프라이즈가 아니라 중간 과정을 공유하면서 예측 가능한 작품을 내놓는 것이 훨씬 중요하더라. 업무를 대충 하자는 게 아니다. 퇴근이라는 1차 마감 시간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뜻이다. 진짜 마감을 지키는 나만의 전략이다. 5년 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마감을 지키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칼퇴요정이라는 과장님의 말에 "정퇴장군인데요."라고 반항한 적이 있었다. 사회화가 덜 된 자의 새초롬한 대답이었다. 언젠가 이렇게 말할 수 있길 바란다. 정시퇴근을 하는 이유는 일을 하기 싫어서, 회사를 탈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고. 오히려 일을 더 오랫동안 하기 위해서라고. 실제로 나는 관 속에 들어가기 전까지 일하고 싶다. 일은 장점이 많다. 돈을 버는 건 물론이고, 관계도 배우고 경험도 쌓으면서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거라도 과하면 독이 된다. 비타민C도 많이 먹으면 화장실 가기가 좀 껄끄러워지지 않나. 일이 좋기 때문에 길게 하고 싶어서 정시퇴근을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