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기

먹다보니 생각하고 쓰다보니 홍보한다

by 올대리

나는 아침에 일어나 원두를 정성스레 간다. 새로 사온 원두라 그런지 갈리는 소리가 다르다. 이전에는 ‘으르륵’의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분명 ‘으슥 으슥 으슥’댄다. 취향으로써 커피를 즐기고 있을 뿐 커피에 대한 지식이 달리 없기 때문에 무엇이 좋고 나쁜지는 가늠할 수 없다. 온 감각을 동원하여 어제와 다른 오늘의 ‘차이’이에 집중할 뿐이다. 수동 그라인더의 나무 손잡이에서 느껴지는 원두의 감촉이라든가, 핸드드립을 할 때 풍기는 원두의 냄새라든가 하는. 오늘은 비교적 단단했고 시큼한 꽃향기가 나는 듯 했다.


한가로운 평일 오전이다. 백수만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이다. 백수가 된 지 얼마 안 됐다―고작 열흘 즘 되었으려나. 할 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갈 일이 사라져 조금은 서글프다. 그러나 커피와 함께하는 이 오전 시간이 나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뭔가 특별해진 것 같고, 부자가 된 것 같고, 심지어는 내가 낭만적인 사람일 수 있다고도 여겨진다. 그래봤자 현실은 우물을 탈출하고 싶은 개구리고, 사막에 가고 싶은 펭귄이지만. 그러니까 나는 ‘무드’나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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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아름다운 시간에 아름다운 커피와 함께 내 손에 들려있는 건 다름 아닌 백설기다. 아무렴, 커피를 마시며 백설기를 뜯어주는 게 최고지. 뜯어먹는 식빵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새하얀 자태. 보슬보슬한 감촉. 다른 냄새에게 선뜻 자리를 내어주는 은근한 체취까지. 꽃향기가 나는 커피 한 모금에 아무렇게나 손으로 뜯은 백설기 한 조각이면 세상을 다 가진 듯하다. 아, 부서지는 백설기 조각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러주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백설기의 묘미니까.


자고로 백설기는 괴롭혀야 제 맛이다. 말랑말랑해 보이지만 뜯어진 백설기는 메말라있다. 큰 몸통에서 분리되는 순간 바스러지는 게 백설기의 특징이기도 하고. 그러나 본래 저 자신이 ‘쌀’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모양인지 조금만 조몰락거리면 탄력 있게 말캉해진다. 흰 가래떡과 비슷한 식감과 맛을 자랑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래떡은 가래떡이고 백설기는 백설기지만. 무엇이 다르냐고? 가래떡이 마이쮸를 통으로 먹는 느낌과 비슷하다면, 백설기는 마이쮸의 단면을 잘라 먹는 것과 흡사하다. 가래떡은 입 안에 탄력이 가득 차 씹기 운동을 세게 해줘야 하는 반면, 백설기는 조금만 씹으면 아밀라아제와 섞여 미끄러지듯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커피 한 잔과 손에 들린 백설기는 이제 사라졌다. 글을 쓰느라 뜯고 맛보고 킁킁 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걸스럽기도 하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내일이면 백설기는 오늘의 쫀득함을 잃어버릴 것이다. 내일 모레면 좀 더 잃어버릴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백설기의 묘미가 점점 없어진다는 뜻이다. 이것이 백설기가 지닌 슬픔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 슬픔을 덜 느끼기 위해 백설기를 빠르게 뜯어 먹는 것이다. 절대로 배가 고파서, 맛있어서, 습관적으로 먹는 게 아니란 말이다. 슬픔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좀 더 먹어야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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