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화이트 와인

먹다 보니 생각하고 쓰다 보니 홍보한다

by 올대리

화이트 와인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무조건 달달할 거란 편견 때문에. 달짝지근한 음료는 꺼려진다. 혓바닥이 저릿해서다. 개운한 느낌보단 불쾌함이 훨씬 크다. 반면 레드와인의 드라이함은 즐긴다. 방울방울들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부드러운 벨벳이 목을 감싸는 것 같다.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레드와인을 한 병 이상 마시게 되면 혓바닥이 보라색이 된다―비틀거릴 정도로 취한 건 여기서 논하지 않기로 한다. 양치질을 몇 번이나 해도 여전히 보랏빛을 띤다. 사람들 앞에서 혓바닥을 내보일 일은 거의 없다지만 왠지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레드와인을 거하게 마신 다음 날엔. 말이 화이트 와인이지 사실상 무색 와인이므로. 아무리 마셔도 혓바닥에 흰빛 기운이 돌지 않는다.


단지 혀를 물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신 건 아니다. 화이트 와인이 달달하지 않을 수도 있단 사실이 나를 자극했다. 광화문의 한 술집에서였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설렘 같은 것. 눈곱만큼도 없는 지식으로 시킨 와인 한 병이었다. 하필이면 그건 화이트 와인이었고, 달달하지 않았으며, 레드와인만큼 드라이했다. 거기에 은은한 청포도 향까지. 환영받아 마땅한 신세계였다. 갑자기 생긴 취향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은 최고의 생일―같이 마신 애인은 탐탁지 않아했지만―이었다.


일요일의 어느 한낮. 나는 화이트 와인을 마신다. 하필이면 먹다 남은 화이트 와인이 냉장고에 있었고 집에 보기 드문 얼음도 있었다. 게다가 나는 한가하게 글이나 쓸 시간을 일부러 만들어 두었다. 도대체 얼마 만에 찾아온 내 일상이지. 언젠가부터 혼자 있는 게 힘들었던 모양이다. 쉬는 날이면 약속을 잡았고, 일을 만들어서 했다. 몸을 혹사시켜서라도 혼자 있는 상황을 피하려는 사람처럼. 화이트 와인에 얼음을 둥둥 띄워 한 모금 삼킨다. 하얀 벨벳이 흘러간 자리에 웅덩이가 생긴다. 알싸하게 취한 나는 스마트폰 전원을 끄고 노트북 전원을 켠다.


글을 쓰기 전엔 늘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개중에는 어제 본 영화 <유열의 음악 앨범>도 있었고, 버즈의 노래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의 가사도 있었고, 추석 전에 끝내야 할 업무 스케줄도 있었고, 중국어를 배웠던 학창 시절의 나도 있었다. 아, 이따 저녁에 삼겹살을 먹자고 엄마에게 제안할 생각도 있었구나. 그래 봤자 나를 꼬신 건 이 화이트 와인 한 잔이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화이트 와인에 대한 이야기만 너저분하게 펼쳐놓고 있다. 왜냐면 너무 맛있잖아. 하필이면 창가에 들어오는 햇빛까지. 금상첨화지.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켰을 때 쓰는 마지막 문단. 어머, 이건 운명인가 봐. 기다란 얼음 두 개가 녹아 처음보단 밍밍해진 맛이지만 그럼에도 사랑스럽다. 다시금 네가 달지 않다는 사실이 떠오르고, 그래서 좋고, 없는 줄 알면서도 들이마시고 있으며, 친구라도 불러내 와인바라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친다. 그러나 나는 월요병을 앓고 있는 직장인이고, 오늘은 일요일이고, 글을 쓰다 보니 어느덧 초저녁이 되었고, 엄마가 차돌박이 숙주볶음을 해준다고 했다. 절대로 차돌박이 숙주볶음 때문에 술집으로 향하지 않는 건 아닐 것이다. 맛있기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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