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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Mar 29. 2022

논문과 스킨답서스의 위로

스킨답서스는 폴리네시아가 원산지인 식물이다. 폴리네시아는 고대 그리스어로 많은 섬을 의미했는데 남태평양에 흩어진 천여 개의 섬을 통칭하여 다소 무성의하게 지은 이름이다. 예를 들면, 제국주의 시대 레몬과 라임을 씹어 먹으며 괴혈병과 싸우던 선원의 눈에 수평선으로 떠오르는 섬이 보인다. 설레는 감동을 안고 묻는다.


'저긴 어디죠?'


누군가 대답한다.


'저긴 많은 섬이라고 부른다네.'


어떤 식이든 김이 빠질 수밖에.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그런데 낭만적이지 않은 건 폴리네시아를 원산지로 삼는 스킨답서스도 마찬가지다.


먼저 꽃이 좀처럼 피지 않는다. 관상식물로 인기가 많은 만큼 해외에서도 우리 집 스킨답서스는 왜 꽃을 피우지 않는지 궁금해하는 질문이 올라온다. 가정에서 키우는 경우는 대개 작은 분재 형태이므로 꽃을 틔울 만큼 성숙할 때까지 10년에서 20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그마저도 환경이 맞지 않으면 아예 꽃을 안 피울 수도 있다.


스킨답서스를 1+1으로 구매했다. 3,000원에 판다


그런데 꽃이 피는 게 좋은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코스모스나 팬지 같은 전형적인 꽃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옥수수 껍질에 둘러싸인 갈변된 바나나처럼 생긴 흉측한 놈이 꽃이라고 불쑥 고개를 내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낭만은 더 멀어져 간다.


게다가 이 녀석은(점점 표현이 거칠어진다) 사실 관상용 식물이라기 보단 잡초에 가깝다. 우리로 치면 칡과 같은 덩굴 식물인 만큼 생존력으로 일가를 이뤘다. 아무 데나 꽂아 놓고 물만 준다면 잘 자란다. 심지어 화병에 물만 채우고 꽂아놔도 전혀 문제없이 생존을 한다. 게다가 다른 잡초처럼 옥살산염이란 화학무기로 자신을 보호한다. 따라서 개나 고양이가 뜯어먹는 걸 방치해선 안되며, 사람도 수액이 몸에 닿지 않도록 장갑과 안경을 끼고 돌보라고 권유되곤 한다.


개운죽과 함께 어항에 놓은 스킨답서스. 잎사귀까지 수중에 완전히 담근채로도 몇달을 산다고 한다.

그런데 꽃을 기대할 수도 없고 화학무기까지 품은 폴리네시아산 칡덩굴이 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가? 왜 우리나라 집집마다 분재 형태로 하나씩 놓여있는가?  물론 공기정화를 시켜준다거나 어항의 질산염을 없애준다거나 하는 이유도 있지만 그건 핑계를 만들어 낸 것에 가깝다. 포름알데히드로 가득한 집안의 공기 정화 효과를 보려면 집안에서 스킨답서스 덩굴을 타고 타잔놀이를 할 정도가 되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웬만해선 죽지 않고, 타인의 무관심에도 꾸역꾸역 살아가며, 꽃을 피우는 연애는 진작에 포기했다. 여기서 우리는 스킨답서스를 바쁜 현대인의 표상으로 이해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목적은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니고 꽃을 피우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들의 행복은 무엇인가? 물어봤자 우린 알 수 없다. 우리도 공기정화나 질산염 감소 같은 여러 핑계를 삶의 이유로 삼으며 살아가긴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아내의 논문이 등재지 수정 후 재심 판정을 받길래 어항에 꽂아놓은 스킨답서스를 보며, 그 정신을 떠올리며 몇 가지 위로의 말을 전해줬다. 그런데 재심 끝에 오늘 게재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축하를 전하며 다시 스킨답서스를 본다. 문득 메일에 보관되어 잡초처럼 방치된 내 논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꽃을 피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상황에 따라 잎을 내며 묵묵히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요란하게 꽃을 내거나 다른 사람의 관심을 구하며 까탈스럽게 굴지 않아도 된다. 무성한 잎으로 살아있음을, 살아왔음을 알리면 충분한 것이 아닐는지.  


그래서 이런 깨달음을 준 스킨답서스에게 낭만적인,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면 어떨까 싶었다.

'현자의 잡초'정도면 어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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