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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field Sep 22. 2024

어떤 하루 Part2: 고추장찌개


  오후 1시, 점심 식사가 끝나면 새벽 5시에 시작되는 남자의 하루는 이제 짧은 휴식기에 접어든다. 좋아하는 교양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보기도 하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훑다가 잠깐 졸기도 한다. 나는 그가 살짝 잠든 틈을 타 TV로부터 도망쳐 컴퓨터를 켠다.


  요 며칠 풀리지 않는 글쓰기 때문에 골치가 아파져 온다. 멍하니 써 놓은 글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고 고치다가 포기하고 책을 한 권 골라 펼친다. 책을 읽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누군가 ‘뇌(腦)는 일하는 걸 싫어한다. 일을 하면 피곤해지는 게 그 증거다.’라더니 금세 피로가 몰려온다. 그렇다면 뇌를 속일 카페인이 필요하다.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오후 5시 전까지 한 페이지라도 더 써야 한다.


  남자가 번식용 암소를 키우기 시작한 이후로 띄엄띄엄 쓰는 일기를 제외하고 글 한 줄 쓰지 않았다. 누구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 시간 동안만큼은 그를 돕는 게 내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20년 가까이 의약품 도매상 영업부에서 일했다. 단지 나와 함께하기 위해 귀농한 사람이었으니 새 사업에 뛰어든 그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에 모든 것이 힘들었던 그는 이제 제법 여유로운 ‘소치기’로 거듭났고, 그와 소들을 위해서만 오롯이 7년을 살았던 나도 다시 하고 싶은 일을 할 여유가 생겼다.


  역시 뇌를 속이는 데는 커피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속도를 내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데 남자가 주섬주섬 작업복을 챙겨 입는다. ‘벌써 5시야? 이제 좀 풀리기 시작했는데…’ 아쉬우면서도 시계를 보니 마음이 급해진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들을 적어 놓고, 아쉽지만 컴퓨터를 끈다. 후다닥 청소기를 돌리며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저녁 메뉴를 구상해 본다. 오늘은 장 볼 시간이 없었으니, 있는 재료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이 ‘냉장고’라는 가전(家電)은 비워도 비워도 한 달쯤의 먹을거리는 비축하고 있는, 참으로 든든한 녀석이다. 나의 친정엄마는 김치냉장고를 포함해 네 대의 냉장고도 모자라 저온 창고까지 운영 중이시다. 부모님은 고향으로 돌아와 가정의학과 의원을 개원하신 지 20년이 되어간다. 환자분들이 철마다 나눠주시는 갖가지 식재료와 김치를 저장할 공간은 늘 부족하다. 전에는 직원들도 함께 집에서 점심을 먹었기 때문에 회전이 빨랐지만, 지금은 부모님과 남동생, 세 식구뿐이니 6개월 이상 냉장고 신세를 지는 재료가 태반이다.


  그 와중에 가장 혜택을 보는 게 우리다. 가까이 살다 보니 각종 신선한 제철 채소와 과일, 김치의 반은 우리 몫인데 배추김치, 섞박지, 갓김치, 열무김치, 오이소박이, 물김치 등 김치 종류만도 다양하다. 덕분에 우리 집은 한 대의 냉장고만으로도 늘 먹을거리가 차고 넘친다. 냉장고에 막걸리가 있는 걸 보니 안주를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애호박과 두부, 돼지 앞다릿살로 남자가 좋아하는 고추장찌개를 끓이기로 한다. (아! 이 고추장도 어느 할머니 환자분이 손수 담그신 것이다.)


  고추장찌개는 경상도 토박이들은 거의 모르고 예로부터 고추장 양념이 발달했던 수도권과 전라도에서 주로 먹는 음식이라고 한다. 나는 이 음식을 40대 초반, 충청도가 고향인 교우(膠友)의 자취방에서 처음 맛보았다. 늘 마음이 헛헛해 보이는 친구가 쑥스러워하며 처음 만들어 준, 채소만 넣어 끓인 찌개는 텁텁하고 단맛이 강했다. 하지만 그 시절 쓸쓸했던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준 따뜻함을 기억하기에 나에게 고추장찌개는 누군가 힘들어할 때 해주고 싶은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어떤 재료를 넣든지 알싸한 고추장 하나로 조화를 이루니 모났던 마음, 미움과 원망, 허무까지도 사르르 녹여줄 것만 같다. 칠 년을 하루같이 새벽 5시에 일어나 소들을 챙기고,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아내를 위해 소리를 죽여가며 아침을 차려 먹고 세탁기를 돌리는, 행여 가족이 힘들어질까 봐 자신의 건강을 열심히 돌보고, 소박한 밥상에도 감사할 줄 아는 내 남자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음식이기도 하다.


  ‘부부는 서로에게 로또다.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으니까.’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우리의 배우자가 사실은 정말 행운의 로또일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화성과 금성에서 왔고, 다른 환경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은 같은 가치관을 갖기 어렵다.* 부모 품을 떠나 천차만별인 사람들에게 얻어맞으며 자라온, 혹은 지켜낸 신념은 또한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모든 것이 변하고 쇠할지라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에리히 프롬이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인 대답’이라고 정의한 ‘사랑’으로 맺어진다.** 사랑은 하나님의 지상 명령이자 모든 악을 덮을 만한 미덕이다. 종소리가 들리거나 불꽃이 튀지 않아도 좋다. 진정한 사랑은 오히려 인내와 의지, 존중과 관심으로 완성되니까.


  “와, 이거 죽이는데! 역시, 최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남자의 칭찬. 나이 든 촌부의 고추장처럼 매콤하지만 부드럽고 튀는 듯 조화롭게, 서로 다름을 진정한 가치로 만드는, 사랑은 계속된다.




* 존 그레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동녘라이프 (1993)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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