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손가락을 보이지 마라. 그러면 모두가 그것을 찌를 것이다. 아픈 것을 하소연하지 마라. 악(惡)은 늘 약점이 있는 곳을 노리니까. 신중한 자는 결코 자기가 상처 입은 것을 말하지 않고 개인적 불행을 드러내지 않는다. 때로는 운명조차도 그대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기를 좋아한다. 그러니 아픈 것도 기쁜 것도 드러내지 마라. 전자는 끝나도록, 후자는 지속되도록 하기 위해서.*
젊은 시절의 나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고 바라는 대로 행동했으며 찬란하게 웃었다. 외향적이라거나 시끄러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늘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았고 그걸 쟁취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떤 과제라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며칠 밤을 새우고도 끄떡없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고 만만찮은 세상과 맞짱 뜰 대담한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세 번… 넘어지고 무너지면서 내가 인간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일과 사랑에 대해서는 또 얼마나 무모했는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람에게 받는 상처는 무척이나 쓰라렸고, 그라시안의 책을 끼고 다니며 나는 성경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을 배우곤 했다. 인간을 이해하고 처세를 가르치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는다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쉽게 치유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죄책감과 후회가 밀려와 피를 철철 흘리는 밤이 아프게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오후, 거래처와의 미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버스 안은 한산했고 따뜻했다. 아주 오랜만에 미세먼지 하나 없는 파란 하늘 때문인지, 기분 좋게 따끔거리는 햇살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꽃처럼 흐드러진 은행잎 때문이었는지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소리 없는 울음이 오랫동안 터져 나왔다. 그 시절 내 안에 그렇게 많은 물이 고여 있었던가…
겨우 울음을 그치고 보니 내릴 곳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쳤다. 낯선 정류장에 내려 근처에 있는 커피숍을 찾아 들어간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과 함께 전자레인지에 데운 불고기 부리토를 주문했다. 달콤 짭짜름한 부리토는 쓴 커피와 잘 어울렸고, 속이 쓰렸지만 허기가 음식을 끌어당겼다.
그 시간은 마치 상처받아 웅크리고 숨어있던 나에게 주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날, 스스로 지운 무거운 짐에 치여 생기를 잃어가는 내 안의 어린아이와 만났고 측은한 그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비로소 깨달은 하루였다.
결국 치유라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화해에서 시작된다. 남을 용서하는 건 어쩌면 아주 쉬운 일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의 해악을 규정(規定)하고, 그로부터 멀어지면 그뿐이다. 반면 자신을 용서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한 나로부터 멀어질 수는 없는 일이니까.
가치관이 뚜렷하고 자존감 강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검열에 엄격하고 도덕심도 투철한 경향이 있다. 자신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타인으로 인해 피해를 볼 수도 있는 보통의 사람임을 인정하는 일이 훨씬 어려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 숨쉬기 위해,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안으로 침잠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한 발 떨어져서 아픈 친구를 보듯 측은하게 바라보자. 그런 후에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일 이후로 마음이 아프거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할 때면 일부러 슬픈 영화라도 보면서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 새로운 습관이 되었다. 한참을 목 놓아 울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면서 몸도 한결 가벼워진다. 실제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카테콜아민’이라는 호르몬의 분비가 많아지게 되는데 눈물을 흘리게 되면 이 성분이 몸 밖으로 배출되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심리적 안정감이 든다고 한다. 더불어 엔도르핀이나 세로토닌, 엔케팔린 등 소위 행복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면역세포도 활성화된다고 하니 혹자는 웃음보다 효과가 크다고 말하기도 한다.
눈물로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머리가 맑아졌다면 이제 문제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는 정신의 힘이 생겼다. 본격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뇌에 기름칠할 차례다. 뇌는 포도당만을 에너지원으로 쓰기 때문에 포도당이 적절하게 공급되어야 한다. 포도당은 탄수화물로부터 얻어진다. 방금 달콤한 음식이 떠올랐는가? 아쉽지만 밀가루나 설탕 같은 정제된 탄수화물의 과다 섭취는 인슐린의 대량 분비를 촉진해 혈액에 포도당 공급이 차단되고 뇌에 포도당이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게 한다.
탄수화물을 먹되 자연적인 형태의 것으로 꾸준히 섭취하는 것이 뇌 건강에 좋다는 얘기다. 또는 탄수화물을 고기나 채소 등과 섞어 천천히 먹으면 급작스럽게 혈당이 오르는 것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비빔밥과 김밥, 현미로 만든 쌀국수나 통밀 파스타, 채소를 많이 넣은 덮밥 또는 부리토 같은 한 그릇 음식도 좋다. 재료에 신경 쓴다면 필수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데다 맛도 근사하기 때문이다. 높은 칼로리는 어쩔 거냐고? 양으로 조절하면 된다.
하지만 하루쯤 나와 화해한 기념으로 배불리 먹고 힘을 내자. 시대를 떠나, 살아가는 일은 늘 만만치 않다. 소중한 나를 살뜰히 돌보며 기회가 올 때까지 현명하게 견뎌내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 발타자르 그라시안, 『세상을 보는 지혜』, 쇼펜하우어 엮음, 두행숙 옮김, 도서출판 둥지 (1991), p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