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nowfield Sep 29. 2024

라면 vs 라면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오늘 점심은 라면으로 때워야겠다. ‘때운다’라고 하기엔 우리의 라면 요리가 좀 거창하다. 남자와 나는 라면을 너무 좋아해 새로 나오는 라면은 꼭 한 번씩 맛을 보지만, 결국에는 한두 가지 브랜드의 제품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 라면 먹는 날, 우리는 정착한 라면에 각자 좋아하는 재료를 넣고 전혀 다른 두 가지 음식을 만든다. 남자는 파와 청양고추를 베이스로 냉동 굴이나 만두를 넣어 깔끔하면서도 풍부한 맛을 추구하는 반면, 나는 마늘로 향을 내고 애호박이나 콩나물 등 그때그때 당기는 채소를 듬뿍 넣어 먹곤 한다. 둘 다 국물은 거의 먹지 않는데, 라면 먹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려는 꼼수다.


  남자와 나는 라면 취향만 다른 게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사람의 성격 유형을 16가지로 분류한 지표로 MBTI란 것이 있다. 90년대 말, 사람들과의 관계에 서툴던 나는 『사람의 성격을 읽는 법』이라는 책으로 이를 처음 접했다.* 당시에는 《포천(Fortune, 미국 경제 전문지)》이 선정한 500대 기업에서 활용하는 성격유형 모델이라고 해서 인기 있는 책이었다. 


  여하튼 사회 인격학의 갈등 관계 분석에 의하면 남자와 나의 MBTI 유형은 ‘이론상’ 최상의 궁합이라고 한다. 남자의 최강점이 나의 최약점, 나의 최강점이 남자의 최약점인 관계라는 것인데… 이는 전혀 다른 서로의 모습을 존중할 만큼 심리적으로 건강하고 포용력이 좋을 경우의 얘기, 네 가지 기능의 순서가 완전히 거꾸로 돼 있는 관계가 궁합이 좋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우리 부부도 좋을 때는 한없이 좋지만, 갈등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서로 노력하면 할수록 극과 극을 향해 반대로 달린다.


  물론 인간관계에는 성격 외에도 여러 가지 변수가 작용한다.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 많은 MBTI나 사회 인격학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라고 하는데 16가지 성격유형에 그를 짜맞추고 있는 내 모습이 한심하기도 하지만, 굳이 핑계를 대자면 누군가를 지독히 이해하고 싶을 때는 어떤 기준에든 의지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이해는 지식을 바탕으로 생기는 법이 아닌가? 상대를 탐구하되 자기 입맛대로 바꾸려 하지만 않는다면 갈등 상황도 제삼자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개인주의자인 내게 남자는 더 이상 분노가 아닌 연구의 대상이다.


  라면 설거지를 마치고 배도 부르겠다 느긋하게 커피나 한잔 마시려는데 느닷없는 물까치 떼가 테라스 밖 잡풀들 사이로 시끄럽게 날아다닌다. 어찌나 정신없이 날아다니며 짖어대는지 혼이 다 빠질 지경이다. 검은 모자를 쓰고 연한 하늘색, 연보라색 날개깃과 꼬리를 가진 이놈들은 예쁘게 생긴 것답지 않게 떼로 날아다니며 가끔은 사람을 공격하기도 한다. 새끼를 지키려는 이유에서니 서식지를 빼앗은 내가 불평할 일은 아니다.


  도로에서 산길로 100m 거리도 안 되는 곳이건만 참새, 산비둘기, 물까치, 뻐꾸기, 까마귀 등등 종류도 다양한 온갖 새들이 새벽부터 떠들어대므로 산에서는 알람이 필요 없다. 강아지 마루는 집 앞 전봇대 위, 망보는 까마귀와 눈싸움을 벌이다 화가 나 어쩔 줄 모르고 같이 짖어댄다. 선잠은 오래 가지 못한다. 새 말고도 쥐, 두더지, 독사, 별별 징그러운 벌레들까지… 청산(靑山)에 산다는 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평소 이것들에 기겁하는 나로서는 난감을 넘어 공포의 공간이었으므로 살짝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살던 집을 정리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내야 했다.


  남자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산에 살아보기는 처음이었으니 표현은 안 해도 힘들고 불편한 일이 많았을 것이다. 요즘은 고라니가 많은 대신 멧돼지는 수가 줄었다. 발굽이 있는 이 짐승들은 구제역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어 늘 경계 대상인데, 산속이다 보니 코앞까지 와서 풀을 뜯는 고라니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다.** 작은 소리에도 도망가는 고라니와는 달리 멧돼지는 쪼끄마한 새끼라도 성질이 사납다. 도망가지도 않고 뒤돌아서 노려보며 덤비곤 하니 남자는 어이가 없다. 멧돼지를 쫓아버리고 나서도 “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저 쪼끄만 게 해보자고 덤비네. 또 오기만 해봐라.” 하며 툴툴대는 남자를 보면 귀엽기도 하고 그저 웃음이 난다.


  힘들고 낯선 산(山) 생활이었지만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빛나는 순간들도 있었다. 7년 전 사랑스러운 송아지들을 처음 만나던 날! 체중이 250kg은 족히 넘는, 그러나 태어난 지 8개월밖에 안 되는 어린 송아지들이 오자 온통 주변에 생기가 돌았다. 강아지나 고양이 말고 동물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연갈색의 털은 부드럽고, 속눈썹 긴 눈이 아름다웠다. 내가 다가가니 겁을 내면서도 반질반질한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고 호기심을 보였다. 남자가 사료와 풀을 주는 동안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밥만 먹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우여곡절 끝에 그 송아지들은 이제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우리는 암송아지 스무 마리로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는데, 8개월령 송아지가 자라 처음 새끼를 낳을 때까지 최소한 16~17개월이 걸린다. 그러고도 수송아지는 8개월, 암송아지는 9개월을 더 키워야 경매에 내보낼 수 있다. 지금은 처음처럼 벌벌 떨지 않고 송아지도 척척 받는 남자지만,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그때는 무척이나 예민했다. 노심초사하며 첫 분만일이 다가오고 있을 무렵, 우연히 기적처럼 남자의 멘토가 찾아왔다.


  아직 죽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을 때 찾아오신 손님이었는데, 마침 번식용 암소를 전문으로 키우시는 분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해부까지 해가며 원인을 찾을 정도로 철두철미하고 해박한 분이었고, 남자는 그날 식사도 거르고 3시간이 넘게 질문을 하면서 갈증을 풀었다. 결국 첫 분만은 그분의 도움으로 진행됐고 그 뒤로도 송아지 몇 마리를 한밤중, 새벽 가리지 않고 와서 받아 주셨다. 처음 만난 우리에게 내밀어 주신 도움의 손길이 얼마나 감사했던지… 그분은 그 후로도 훌륭한 멘토로서 지식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계시고, 성실한 멘티가 되어 그분의 노하우를 빨아들인 남자는 이제 제법 솜씨 있는 소치기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뜻밖의 만남이 삶을 더 풍요롭고 즐겁게 만든다. 산에 사는 낯선 존재들과의 조우는 내게 짜릿한 긴장감을 주고, 예기치 않은 사건들은 나의 삶을 한결 다채롭게 한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가진 한 남자를 사랑한 것도, 그와 함께 소치는 삶을 선택한 것도, 뜻밖에 좋은 인연들을 만난 것도 지루하고 상투적인 나의 일상에 던져진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까?




* 폴 D. 티저 & 바바라 배런 티저, 『사람의 성격을 읽는 법』, 강주헌 옮김, 더난출판사 (1999)

** 구제역: 국제수역사무국(OIE)에서 A급질병(전파력이 빠르고 국제교역상 경제피해가 매우 큰 질병)으로 분류하며 우리나라 제1종 가축전염병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전 04화 불고기 부리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