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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field Sep 23. 2024

아욱된장국

  

  나의 친정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우리 형제들이 소를 키웠으면 하셨다. 환자 보는 일을 사랑하는 천생 의사지만 하루 종일 진료실에 갇혀 계시니 자식들은 건강한 노동을 하면서 시간적 여유도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거였다. 새벽형 인간으로 꾸준히 아침 운동을 하고 텃밭과 정원까지 가꾸시는 아버지와 달리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저녁형 인간인 데다 몸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남동생과 나는 못 들은 척하기 일쑤였다.


  우리 부부가 귀촌 후 시간이 좀 지나서 장기적인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누군가 목장을 운영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정보를 들으신 아버지께서 조건이 너무 좋으니 한번 도전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다. 손해 볼 것 없으니 얘기나 들어보자 하고 별 기대 없이 목장을 방문했던 날,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분명 쇠똥 냄새는 진동하고, 벌레도 많고, 지저분하겠지.’라는 예상을 뒤엎고 툭 터진 전망에 너무나 쾌적했던 것! 소설 『오후 4시』에서 에밀의 집이 그를 끌어당겼던 것처럼 그날 나는 여기에 살게 될 것을 직감했다.*


  전(前) 목장주였던 ‘김 전무님’은 문중 소유의 산을 장기 임대해 30년 넘게 소를 키우셨다. 소가 늘면 축사를 하나씩 늘려서 크고 작은 축사가 8~9개 정도 되었는데 이미 낡아 못 쓰는 것도 많았다. 그래도 조합의 지원을 받아 지은 커다란 신식 축사 옆에는 본인의 벽돌집과 일을 돕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작은 목조주택도 있었다. 부인이 조금 일찍 병을 얻으셔서 요양병원에 모시고 혼자 사셨는데, 80세가 훌쩍 넘어 목장 일이 힘에 부치자 후임자를 찾으시던 중이었다.


  처음에는 엄두도 안 난다며 손을 내젓던 남자를 설득해 8개월 정도의 수습 기간을 거친 후 우리는 소 치는 삶에 입성했다. 남자가 자기에게 딱 맞는 새 천직을 찾은, 우연한 기회가 필연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우연과 필연은 씨실과 날실처럼 우리 삶에 주어진다. 하나의 정자와 하나의 난자가 만나 탄생하는 인간은 시작부터 우연에서 비롯된 존재이고, 그들의 삶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이라는 필연으로 끝을 맺는다. 살아가면서 억울하거나 옳지 않은 일들을 겪어본 우리는 사필귀정, 인과응보를 믿고 싶다. 반면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필연은 피하고만 싶다. 또 우리는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 로또 당첨을 바라는 한편,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뉴스 속 우연에 너무 많은 피로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우연과 필연이 반복되는 생(生)의 과정 속에서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연의 선물인 선택의 자유와 기회를 얻고, 그 모험의 여정에서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우연과 필연이 우리 삶에 던져질 때 씨실과 날실을 엮어 하나의 멋들어진 천을 짜고 그 천으로 내게 어울리는 옷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은 또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멋진가!


  ‘소 치는 삶’이라는 기회를 선택하고 무수한 실수와 실패를 딛고 일어서 의미 있는 필연으로 만들어 가는 것,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이제 남자의 가치가 되었다. 성실한 그는 꾸준히 노력하여 하루하루 더 체계적이고 발전적인 소치기가 되어간다. 그리고 지금 행복하다고 말한다. 직설적인 사람이니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요리의 즐거움도 이와 비슷하다. 우연히 나의 냉장고로 들여진 재료들은 어떤 음식이 될 운명이다. 그런데 재료의 종류, 써는 모양, 익힌 정도, 조미료의 유무에 따라 매번 다른 음식이 나온다. 한식의 기본인 국만 봐도 그렇다. 봄에는 냉이와 달래, 머위와 쑥이 나고 여름에는 감자와 애호박, 양파가 제철이다. 가을에는 각종 버섯과 아욱, 무를 넣고 겨울에는 쑥갓과 봄동으로 비타민을 보충한다. 이 다양한 재료를 손질하면서 된장을 넣을지, 간장과 소금으로 맑은 국을 끓일지, 걸쭉하게 들깻가루를 풀어볼지, 고춧가루에 후추를 곁들여 칼칼하게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한다. 거기에 음식을 먹을 사람의 취향과 그날의 기분, 날씨까지 타진하다 보면 경우의 수가 끝도 없다. 그중에서 오늘의 요리를 선택하는 것이 바로 ‘나’다.


  오늘의 나는 아욱된장국과 느타리버섯 잡채를 만들기로 한다. 백년손님인 사위한테만 준다는 가을 아욱국은 싸리문을 닫아걸고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맛과 영양이 풍부하다. 보통 된장국은 멸치육수를 많이 쓰지만, 아욱국은 궁합이 좋은 건새우를 넣어 먹는다. 질긴 줄기 껍질을 벗기고 소금물에 바락바락 씻어 풋내를 제거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귀찮아도 한번 맛을 보면 잊지 못할 만큼 부드럽고 맛있다. 역시 가을이 제철인 느타리버섯으로 만들 당면을 넣지 않은 잡채도 담백한 국에 잘 어울릴 것이다.


  나의 음식처럼 나의 삶 또한 우연에 내맡기지도 필연에 떠밀리지도 않는, 내가 주인이 되는 의미 있는 행로이기를 다짐해 본다.




* 아멜리 노통브, 『오후 4시』, 김남주 옮김, 열린책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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