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nowfield
Nov 04. 2024
바다의 불로초라 불리는 톳. 오독오독한 식감이 재미있다. 톳은 식감뿐 아니라 철, 칼륨, 칼슘, 마그네슘 등 각종 미네랄을 다량 함유하고 있고 후코이단, 알긴산, 식이섬유 또한 풍부해 천연 암 예방제로 주목받고 있다. 남해안, 제주도 지역에서 많이 먹어왔던 톳은 거의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었는데 항산화, 항염, 혈당 조절, 다이어트 등에 좋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요즘은 염장 톳을 쉽게 볼 수 있는 데다 밥에 넣어 먹는 말린 톳도 판매되고 있다.
살짝 데친 톳과 역시 한 번 데쳐서 물기를 짠 두부를 소금이나 간장으로 간을 하고 주무르듯 무쳐서 고소한 참기름을 두르면 맛있는 다이어트 반찬이 된다. 남자도 톳을 두부와 함께 무치는 건 처음 봤다며 맛있게 먹는다. 부드럽고 고소한 두부가 입에 감치다가 톡 터지는 톳이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두부 톳무침. 두 가지 전혀 다른 재료의, 간장과 참기름에 의한, 채식 식단과 다이어트를 위한 완벽한 콜라보다. 이 음식은 좀 거창하지만 ‘서로 다름은 가치’라는 내 신조와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하나의 예다.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 셋이 놀러 와 집에서 하루를 묵고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괄괄하고 시원시원한 데다 오지랖이 넓은 J가 어려서부터 성숙하고 예뻐서 인기가 많던, 웃음 많은 H에게 말했다.
“너는 겉보기엔 여우 같은데 곰이야, 나는 곰 같아도 완전 여우고.”
둘의 얘기를 한창 듣고 있다가 내가 물었다.
“나는 곰이야, 여우야?”
한 번도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는 남자 동창 P가 잠시 생각하더니 “여우도 곰도 아니야. 너는 보살이여~” 하는 통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개성 뚜렷한 세 친구가 얼굴에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나라는 사람에게 다 속고 있다. 나는 단지 평화와 안정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내 의견을 피력하기보다는 무난한 다수의 의견을 따르고, 뭔가 스파크가 튈 거 같으면 중재하거나 피하느라 바쁘다.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고 그냥 웃으며 들어주는 것만 해도 보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일대일 상황이 되면 얘기가 다르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은근히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고 고집도 세다. 가끔은 까칠하기까지 하다. 나름대로는 근거가 있는 주장과 고집이다. 그러나 조용히 정보를 조합해 직관에 따라 판단을 내리고 짧게 결론만 말하니, 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길이 없는 상대는 '아닌 밤중에 내민 홍두깨'에 어리둥절할 뿐이다. 24시간 붙어 있는 남자의 기막힘은 오죽하겠는가!
친정 식구들은 내 성격을 알고 있으니 알아서 피하는데, 한창 예민할 때는 남동생이 마녀라는 별명도 지어주었다. (글을 쓰다 보니 최대한 순화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나이가 들면서 조금 두루뭉술해지긴 했지만, 가끔 삐져나오는 이런 성격 때문에 친한 친구들도 알면 알수록 내가 어렵다고 말하곤 한다.
성격(性格)이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질이나 품성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 본성(本性), 인격(人格), 인간성(人間性), 성품(性品) 등이 있다.
프로이트는 사람의 성격은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구성된다고 분석했다.
이드(id)는 무의식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이를테면 원초적 본능을 추구하는 요소다. 성격에 추진력이나 정신적 에너지를 공급하는 이드는 쾌락을 얻고 고통을 피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당연하게도 ‘리비도(libido)’라는 성욕을 추구하는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 리비도가 정상적으로 제어될 때 이드가 성장하고 본능적 욕구와 외부의 객관적 세계가 현실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자아를 발달시킨다고 한다.
자아(ego)는 좀 더 높은 수준의 지적·논리적 기능 및 지각 기능을 통제하는 것으로 결국 행동을 통제한다. 쉽게 말하면 유아기와 아동기를 거치며 사회적·신체적으로 성장하면서 현실적·논리적 사고를 통해 이타심을 가지게 되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라는 것이다.
초자아(superego)는 가장 늦게 성장하기 시작하는 요소로 사회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의 수용을 나타낸다. 본능에 따른다기보다는 도덕적·이상주의적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자제(自制)’의 아이콘이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양심(良心)을 들 수 있다.
여하튼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로 구성된 성격은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영향에 의해 형성된 개인의 독특한 심리적 체계이며 행동 양식이다. 태어나면서 노출된 상황이 모두 다르고 살아온 길이 다른 사람들을 몇 가지 성격 유형으로 나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MBTI 검사를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할 때마다 결과가 다르게 나올 수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중인격이 아니더라도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불쑥 튀어나올 때도 있고 나조차도 나를 모른다는 얘기다. 이런 식의 분류는 패를 가르고 남을 판단하기 위해 맹신하는 것은 위험하고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 수단 정도로 삼길 바란다.
나는 늘 성격의 다양성에 마음이 끌린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서로 다름에서 나온다는 말은 얼핏 일리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라는 오만과 편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만한 사람은 잘난 체를 넘어 남을 업신여기는 건방진 인간으로, 조용히 자기 별로 떠나야 한다. 극단적 편견은 히틀러 같은 사람을 낳고 여러 사람을 파멸로 이끈다.)
서로 다름을 ‘가치’로 보면 전혀 다른 시야가 펼쳐진다. 왜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가? 왜 굳이 다른 문화를 체험하고 느끼고 싶은가? 왜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싶은가? N극과 S극은 왜 서로 끌리는가? 색다르고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에 매료된 우리는 왜, 나와 다른 사람을 가치로 보지 않는가?
젊을 때는 기를 쓰고 내가 옳음을 증명하기 위한 혈투를 벌였다. 경험상 웬만한 일은 꼭 내 뜻대로 하지 않아도 결과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생각을 고집했더라면 위태로웠을 상황도 분명히 있었다. 남자와 나는 세상일을 인식하는 방법, 매사에 대응하는 태도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굳이 내 방식을 주장하지 않고 웬만하면 그의 뜻에 따른다. 바쁜 일도 없고 조금 늦게 가도 되는데 싸우다 보면 아예 못 가는 일이 생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나도 골머리 썩이지 않아도 되니 일거양득이다.
세상에 나 혼자라면 내 의지대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겠지만 발전도 더디고 그 책임도 온전히 내 몫이다. 다양한 생각이 있기에 인류가 빠르게 발전해 왔고 수많은 예술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에 그 많은 직업이 생겼고 모든 일을 다 하지 못하는 내 약점들을 보완해 왔다.
그러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아니라면 다양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구경하며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