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러울 것 없이 또 잠을 설쳤다. 밤새 가상의 대화를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고 또 하고, 할 말을 다 못 해서 선 잠에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커피 머신의 버튼을 누르고 기계가 예열되기를 기다리며 머그에 물을 가득 따라 들이킨다. 빈 속에 커피부터 들이켜자니 나를 너무 학대하는 것 같아 물 한 컵을 먼저 위장에 채운다. 설거지 감을 늘일 수 없으니 같은 머그에 졸졸 내려오는 커피를 받는다. 샤워 시간, 머리 말리는 시간, 최소의 치장을 하는 시간, 옷 입는 시간을 초 단위까지 계산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지각할 수밖에 없게 회사에서 멀리 사는 주제에 유일하게 누리는 아침의 여유가 커피를 내리는 시간이다. 걸핏하면 파업하거나, 고장 나거나, 아픈 환자가 타고 있어 멈춰 버리는 RER 선에 의지하여 출근해야 하는 파리 교외에 살기 때문에 아침의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커피 한 잔은 포기하지 못하겠다.
대학원 졸업 후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공과 관련 있다고 말하긴 좀 멀고 무관하다 하기엔 애매한 분야의 연구 계약직을 구했다. 이름이 꽤 알려진 기관이었기 때문에 계약직이라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축하를 받았지만 월급은 빠듯했다. 그 돈으로 파리 시내에 살고자 하면 오래된 건물의 맨 꼭대기층 시녀 방 정도는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100년 전 프랑스 시녀처럼 끝없는 계단을 올라 분명 하늘에 제일 가까운데 볕이 귀하고 습한 방에 살기보다 시내에서 멀어도 안전하다는 교외의 동네에 작은 방을 얻기로 했다. 그 안전하다는 것도 몇 달 지나지 않아 허상임이 밝혀졌지만. 악명 높은 18구에서부터 오토바이를 타고 원정 온 강도에게 아이폰을 털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는 집의 부엌 창을 깨고 도둑이 들어오려 했던 일로 보험회사와 집주인에게 연락하느라 바쁜 와중에 증언을 부탁한 아파트의 청소와 잡일 담당 가디엔느는 이렇게 말했다.
“Oh-la-la. 이 동네에서 7년 동안 가디엔느를 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 봐!”
그러게요. 왜 하필 나였을까요? 그리고 당신은 두 꼬마 녀석들이 우리 집 앞 잔디밭을 배회하며 기웃거리더라는 증언을 하기 전에 그들 좀 쫓아내 주지 그랬어요. 그렇게 가장 안전한 동네의 가장 작은 방에서 도둑이 들어도 훔쳐갈 게 없어 다행인 나날들이 흘러 명망 있는 회사의 끄트머리에 붙어 그럭저럭 연구 비슷한 것을 하는 동안 계약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내가 계약 기간 동안 얼마나 성실히 일했는지, 기존에 되어 있던 작업에서 발견하고 고친 오류가 얼마나 많은지, 앞으로도 이런 염가에 봉사할 각오가 단단히 되어 있음을 어필할 기회도 없이.
기관의 이름값이 대외적으로는 그럴싸해 보이기 때문에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이 무급 인턴이라도 하겠다며 줄을 서 있다는 둥, 본국에 돌아가면 파리에서 일하는 것의 몇 분의 1만 되는 월급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으려는 개발도상국 출신 직원들이 얼마나 공격적인지 떠드는 회사 내 가십을 생각하면 나의 염가 노력 봉사 약조 같은 것에 회사는 귀 기울일 것 같지 않아서 적극적으로 기회를 찾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결국 초조해져서는 형식적으로라도 팀장과 얘기를 해 봐야 하는 것 아닐까 했는데 마침 그는 해외 출장 중이었다. 망설이다가 혹시 계약 연장이 가능할지 얘기해 보고 싶다고 묻는 이메일을 썼고 예상과 달리 그는 매우 친절하고 빠른 답장을 보냈다.
“물론이지,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너를 만날게. 그때 얘기하자!”
그게 바로 오늘이다. 그래서 실망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아주 작은 희망만 품고 출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식어 버린 커피를 털어 넣고 잡생각이 길어 오늘은 좀 늦을지 모르겠다는 또 다른 잡생각을 하며 길을 나섰다. 커피 캡슐 1유로.
파리의 지하철은 혼돈이 새로운 형태의 질서로 거듭나는 광경을 보는 것 같다. 사거리 대신 둥근 회전교차로 (Rond-point 홍-뿌앙)에서 차선도 신호도 없이 수많은 차들이 머뭇거리지 않고 어떻게든 틈을 잡아 비집고 들어오듯이, 그 무질서 속에서도 용케 사고는 생각보다 안 나듯, 지하 속 세계도 멈추지 않고 운행되는 질서가 있다. 머뭇거리지 않고 서로의 앞으로 진격하지만 부딪히지 않고 자기가 갈아탈 노선이 연결된 출구로 종종걸음 치는 파리지앙들 사이에서 나 홀로 멈춰 선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나도 갈아탈 곳쯤은 안다.
붐비는 지하 1층을 서둘러 빠져나와 더 지하로 들어가면 그곳에 나를 기다리는 한 청년과 개가 있다. 파리의 거의 모든 노숙자들은 개를 데리고 있는데 이 사지 멀쩡해 보이는 젊은이와 항상 졸고 있는 누렁이의 조합이 수많은 노숙자와 개들 중에 내 마음에 들어온 것이 몇 달 전이다. 그는 시리아에서 온 난민 출신이라는 종이를 들고 있거나, 잿빛 머리와 굽은 등에서 세월의 상처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노인이라거나, 하다못해 옆에 목발 같은 것을 두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다. 젊은 백인 남자여서 누구도 그를 동정하지 않아 늘 앞에 놓인 모자가 텅 비어 있었다. 데리고 있는 개는 또 얼마나 파리에서 찾기 힘든 토종 누렁이같이 생겼는지 개가 꼭 한국말로 짖을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주는 이 동전이 청년의 술값이 될지 개의 사료값이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가 기운을 차려 오늘은 개를 잘 먹이길 바라며 동전을 던져 주는 것이 출근길의 루틴이 되어 버렸다. 회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멋쟁이 동료는 매일 새 옷을 입고 갈 데가 필요해서 출근한다고 농담을 했는데 나는 내가 더 이상 가난한 학생이 아니라 남에게 동전 한 닢쯤은 줄 수 있는 사람임을 확인받고 싶어 출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청년과 누렁이에게 2유로.
찌린내 나고 좁고 쥐가 사는 낡은 지하철을 빠져나와 각국 대사관, 고급 상점, 부자들이 사는 오스만식 건물이 모여 있는 16구의 사무실로 뛰어 왔다. 1분 전까지 있던 지하 세계와 너무 다른 사무실의 안락함이 생경할 때, 내가 여기 속한 건지 실감 나지 않을 때, 아직 잠이 덜 깨어 그런 것 같아 카페테리아에 내려갔다. 카페 라테 4.5유로.
회사 근처
오후가 되어 팀장이 나를 부를 때까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해 놓고 나갈 일이 남았는데, 최선을 다해 주고 싶지 않은 심술이 들어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느릿느릿 일했다. 파리 공항에서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는 직원들도 일부러 도장을 슬로 모션으로 찍어 주는 태업을 하는데, 그게 노동자의 권리라는데, 나도 마지막 주에 이쯤은 노닥거릴 수 있지 않겠나. 어디에 쓸지 모르지만 여기를 나가고 나면 접근 불가능할 것 같은 각종 논문과 자료도 잔뜩 내려받았다.
“그래, 내가 널 위해 뭘 해 줄 수 있을까?”
출장에서 돌아온 후 집에 들르지 않고 공항에서 바로 사무실로 왔다는 팀장이 하품을 참으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물었다. 우물쭈물. 중얼중얼. 무슨 말을 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여기서 그동안 얼마나 만족하며 일했는지, 내가 좀 잘하지 않았느냐고, 프로젝트가 끝나도 이런저런 과제가 더 남은 걸로 아는데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참을성 있게 내 말을 끊지 않고 듣던 팀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럼 알지. 나도 그동안 네가 보여 준 퍼포먼스에 만족해. 그렇지만 너도 알다시피 예산이란 게 항상 타이트하다니까. 이미 내년도 예산은 거의 픽스가 되어 있어서 새로 사람을 고용할 수가 없네. 지금 하는 프로젝트만으로도 우리 팀 예산은 다 써 버리니까. 하지만 회사 내 만 30세 이하 주니어들만 지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기는 거 알지? 거기에 지원해 보는 게 어때? 내가 추천서는 잘 써 줄 수 있어.”
“난 이미 서른 살이 넘었는 걸.”
씁쓸한 내 대답에 놀란 그의 흐리멍덩했던 눈동자가 잠깐 좁게 모였다.
“와, 너 서른 살이 넘었단 말이야? 몰랐는데. 언제 넘었어, 얼마 전에? 아깝게 올해 넘은 거면 약간 무리해서 지원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아주 예전에 넘었어.”
역시 동양인의 나이는 알 수 없다며 팀장이 혼잣말하는 것을 보며 그와 나의 정해진 역할극이 미세한 탈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밤낮이 바뀐 지구 남반구에서 계약직 직원의 이메일을 받은 팀장은 귀찮지만 이런 직원들을 최대한 불평 없이 내보내는 것도 자신의 업무 중 하나였으므로 빠른 답장을 보냈을 것이다. 모양새 좋게 거절할 방편으로 언제나처럼 주니어 프로그램을 들이밀었는데 그만 이 눈치 없는 한국인 직원은 나이까지 많았던 것이다.
나도 한때 아무것도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기대를 받던 젊은이였다. 젊은 게 무기라서 실패해도 괜찮았고, 경력이 없어도 쌓아 나가는 중이라 말하면 됐고, 잘 모르는 건 아직 배우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이제야 처음으로 젊음 외의 무기를 갖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자리에 섰는데 무대에서 어떻게 퇴장해야 할지 모르는 단역 배우처럼 난처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래요, 그 프로그램에 지원해 볼게요. 추천서 미리 감사합니다.’라는 지정된 대사 대신 무어라 말하며 이 난감한 롤플레이를 끝낼 수 있을까. 늘 졸고 있어서 한 번도 똑바로 들여다보지 못한 노숙자 옆 누렁이의 눈동자가 차라리 지금 나를 빤히 응시하는 팀장의 충혈된 눈동자보다 생기 있을 것이다.
우물쭈물. 중얼중얼. 그래도 나를 만나 줘서 고맙다, 한 번 다른 기회 있는지 그래도 알아봐 달라고, 무엇보다 여독이 심해서 피로할 텐데 얼른 쉬라고 그렇게 아무 말이나 했을 거다. 쉬긴 어떻게 쉬냐며 ‘이런 게 내가 할 일이지’라고 안도한 팀장이 환하게 웃으며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그의 시간을 정확히 15분 빼앗았다. 더 이상 절박하게 매달리지 않고 치우기 쉬운 계약직이 되어 주는 것, 그게 내가 피로에 찌든 그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 아니었을까. 늘 그랬다. 남에게 절박하게 매달리기보다 먼저 포기해서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세상 헛똑똑이’.
오늘은 퇴근하면서 또 누렁이를 만날 수 있을까. 낮에는 다른 데에서 활동하는지 보통 저녁 퇴근길에는 청년과 누렁이를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오늘은 누렁이의 깬 모습을 보고 싶다. 하루 종일 소득 없이 돌아다니기만 했는지, 아니면 친절한 파리지앙을 만나 주인의 담배 한 갑을 사고도 네 녀석 먹을 간식 캔 하나쯤 살 수 있는 돈을 벌었는지 물어보고 싶다. 난 불어가 짧으니 사람이 아니라 개에게.
계약 기간이 끝나가고 있는 것을 아는 옆자리 동료가 팀장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온 나를 흘끗 쳐다본다.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궁금해 죽겠는 그의 표정을 읽었지만 무시하고 가방을 챙겼다.
“약속 있니? 오늘 멋지게 입었는 걸. 좋은 저녁 보내!”
15분 만에 팀장 사무실에서 나왔으니 들으나마나 위로해야 할 상황이라고 생각했는지 그가 내게 공허한 칭찬을 던진다. 옷이 멋있으면 아침에 보자마자 말했을 텐데 퇴근하는 다 저녁에 옷 칭찬이라니.
바로 지하철을 타고 싶진 않아서 역 앞의 오래된 카페에 들어갔다. 테라스 자리엔 나의 누렁이와는 달리 팔자 좋은 개들이 주인이 신문을 읽는 동안 비둘기를 노려 보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꼬리를 흔들며 동상처럼 앉아 있다. 카페 실내에 관광객은 없고 구석 자리에 샤넬 트위드 재킷을 입은 할머니가 치매 예방에 좋다는 퀴즈를 풀고 있다. 실내 흡연이 금지되기 전에 핀 담배 냄새가 아직도 배어 있는 빨간 벨벳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흰 셔츠와 검은 바지를 단정히 차려입은 웨이터가 주문한 카페 알롱제를 갖다 준다. 파리에서는 아메리카노를 찾기는 힘들고 에스프레소는 아직 익숙지 않아서 늘 카페 알롱제를 시킨다.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에 물을 탄 것이고 카페 알롱제는 더 많은 물을 통해 커피를 좀 더 긴 시간 추출한 에스프레소라고 한다. 다 된 것에 물을 탄 것과 처음부터 물을 많이 잡아 내린 게 얼마나 다른지 모르지만 커피의 세계에선 꽤 중요한 거겠거니, 그러니 다른 이름을 붙인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만 할 뿐이다. 적성과 소질에 딱히 맞는 것도 맞지 않는 것도 아닌 일을 과감히 그만두고 나오는 것이나, 계약이 연장되지 않아 등 떠밀려 나오는 것이나 얼마만큼 다른지 모르지만 경쟁의 세계에선 아마도 다른 이름을 붙일 것이다. 하나는 도전자, 다른 하나는 패배자.
커피를 홀짝 들이켜고 한 모금이 남았을 때 평소라면 건드리지 않았을 흰 설탕 봉지를 뜯어 커피잔에 붓는다. 커피의 쌉쌀함을 머금고 녹아버린 설탕 덩어리에서 어린 시절 먹던 달고나 맛이 난다. 카페 알롱제 3. 8유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집으로 갈까. 공원을 걸어 볼까. 누렁이를 만나면 좋겠다. 주머니 속 만져지는 거스름돈 1. 2유로. 오늘 먹은 커피 세 잔. 그리고 파리에서 살아가야 할 날 앞으로 또 얼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