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에 쓰는 동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갑자기 집도 직업도 잃고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동안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이기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하는구나.”
자책감에 괴로웠으나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살며 돈의 노예로 살다가 소중한 사람들을 놓쳤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 이제는 내가 지나쳤던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하고 힘을 주면서 사람 구실 하며 살아 봐야지.”
이미 친구들은 다 떠나가서 찾아갈 친구가 없었던 사람은 연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동안 바쁘다고 소홀했던 연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앞으로 충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나는 우리의 연애가 적당해서 좋았어. 너는 적당한 돈을 벌고 무난한 성품을 갖고 있어서 우리는 주로 소박한 식사를 같이 하고 때론 조금 비싼 식당을 찾아간 날이면 소화를 시킬 겸 걸어가자며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오래 강변을 걷는 데이트를 했지. 난 우리의 그런 적당한 연애가 좋았는데 이제 넌 그럴 만한 돈도 직업도 없잖아. 오히려 이제 와서 내게 충실하겠다는 약속은 지나친 집착으로 느껴지는구나.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도 아닌데 나를 속물이라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난 너를 사랑한 거야. 그저 연애를 한 게 아니라. 어떻게 내가 너를 적당히 사랑할 수 있겠어?”
“멈춰야 할 때를 모르면 우리의 적당히 빛나던 추억도 꺼져 버릴 거야.”
사람은 모든 소유물을 집에 두고 나왔기 때문에 연인에게 손에 낀 반지라도 건네주고 싶었지만 연인은 주먹을 꼭 쥐고 손을 등 뒤로 숨긴 채 말했습니다.
“우린 이제 서로 언약할 것이 없잖아. 다른 주인을 찾아 주렴.”
그나마 값이 조금 나갈 듯한 마지막 물건도 연인에게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는 걸 안 사람은 큰 상처를 받고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그래, 모두 날 외면해도 어머니만은 날 버리지 않지. 그동안 못한 걸 이제라도 잘해 드리자.”
이미 따로 산 지 오래지만 어머니는 언제고 사람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문을 걸지 않고 열어 두고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신의 장난감 기타 연주를 들으며 활짝 웃었던 것을 기억하며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옛 노래를 열심히 불렀습니다. 노래를 다 들은 어머니는 훌쩍였습니다.
“얘야. 그 노래를 들을 때의 엄마는 젊었고 너는 행복한 어린아이였지. 너의 장난감 기타 연주와 음정이 틀린 노래와 장난스러운 엉덩이춤에 난 해산의 고통 없이 아이를 품은 것처럼 배가 부르고 기뻤어. 하지만 늙은 어미가 쓸쓸히 배를 곯고 있을 때 넌 어디 있었니? 지금 엄마는 오늘 저녁 한 끼가 걱정인데 너는 태평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냐? 게다가 너 직업을 잃었다며. 엄마는 소식 없던 네가 행복한 소식을 들고 저 문으로 뛰어 들어오길 바랬는데...... 이 나이에도 넌 엄마를 걱정시키는구나. 내 가난에 네 근심이 더해졌으니 엄마는 이제 어찌 잠을 잘까.”
연인에겐 몇 마디 대꾸라도 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에게 사람은 단 한 마디도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말 중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머니의 집을 떠나 길가에 섰습니다. 애정도 효심도 받는 사람이 받고자 하지 아니하면 줄 수가 없었습니다. 반지를 땅에 묻은 사람에게 남은 것은 낡은 외투 한 벌뿐이었습니다.
어느 고개를 넘을 때 사람은 추위에 떨고 있는 학자를 보았습니다. 바람이 부는 고개에서 그는 얇은 박사 가운을 걸치고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지만 이제 베풀며 살아가기로 한 사람은 그에게 다가가 외투를 걸쳐 주려고 했습니다. 학자는 고개를 다리 사이에 파묻고 괴로워하다 자신의 등 위에 닿은 거칠고 두툼한 겉옷의 무게에 놀랐는지 고개를 쳐들고 사람을 보았습니다. 교양 있고 겸손한 말투로 그는 말했습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정말 추워 보이는 걸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어요.”
“나는 그동안 헛된 연구와 부족한 저작물로 수많은 제자들을 미혹시켰으니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당신같이 훌륭한 분이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닙니다.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한 모든 연구가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것인지 알 테죠. 그중에는 정말 흥미를 갖고 밤을 새워 한 연구도 있었지만, 시간에 쫓겨 얼렁뚱땅 써낸 쓰레기에 불과한 것들이 섞여 있어 내 마음을 괴롭게 하는군요. 이제 은퇴를 앞두고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니 내 집무실 서재를 비우며 집으로 가져가야 할 책은 한 권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좀 더 칼바람을 맞아야겠습니다. 그게 제게도 이로울 것입니다. 조금은 정신이 차려질지도 모르니까요.”
학자가 정중하지만 완강하게 거절하는 것을 사람이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도 그 정도의 눈치는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포기하고 다시 외투를 거둬 길을 떠날 때 학자는 코를 막고 조용하게 중얼거렸습니다.
“보아하니 배움이라고는 없는 자 같은데, 내가 무슨 학문을 했는지 알기나 하고 말을 건 것일까? 냄새나는 나그네의 동정까지 받다니 나도 참 밑바닥까지 떨어졌나 보구나.”
사람은 그 소리를 듣고 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자격 없는 사람은 존경도 동정도 할 수 없다면 지금 자신에게 허락되는 선행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지금이 집과 직업과 친구들을 잃은 처음보다 더 절망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때 누군가 사람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 옷을 나에게 벗어 주시오.”
“누구십니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데 내 옷을 대뜸 벗어달라고 하는 거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나는 사람입니다.”
“나도 비슷하오. 그냥 당신이 바라는 무언가, 소망 같은 거라고 해 두지요. 이름 붙이기 나름인 존재이지요.”
“당신은 스스로 빛나고 따뜻해 보이는데...... 굳이 내 옷이 필요해 보이지 않아요.”
“나는 당신의 소망이기 때문에 당신 옷이 필요한 거요.”
소망이라는 혹은 그 비슷한 무언가로 불린다는 이가 사람의 외투를 거의 뺏다시피 낚아채 가더니 자신의 어깨에 척 걸치고 매우 흡족해했습니다.
“이제 딱 되었군! 외투가 먼지 묻고 꽤나 낡은 걸로 보아 여기까지 나름 멀고 험한 길을 거쳐 왔나 보군요. 우선 그 점을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소. 그동안 나 역시 이 사람 저 사람이 벗어주는 옷들을 걸쳐 보았지만 영 불편하더군요. 맞지 않는 옷을 걸친다는 흔한 표현 알지요? 내가 딱 그 짝이었지 뭐야. 어떤 건 너무 두꺼워 덥고 어떤 건 너무 얇아 충분치 않고 어떤 건 너무 작아 어깨가 꽉 끼고 어떤 건 너무 커서 소매가 헐렁거려 손으로 아무것도 집을 수 없고...... 나는 바로 당신이 옷을 벗어주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옷은 겸손하신 학자 양반께서도 거부한 남루한 옷입니다.”
“아, 그 양반은 본인의 직업을 과시하기 위해 멀리서 오는 나그네도 보라고 일부러 얇은 박사 가운만 입고 있는 사람 아니오? 당신의 옷이 남루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치적을 가릴까 봐 타인의 도움을 거절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오.”
“정말 이 옷을 당신께 드릴까요? 이 옷은 나의 마음을 거부할 리 없는, 거부하고 싶어도 발이 땅 속에 깊이 박혀 도망갈 수 없는 돌멩이 위에 덮어 두고 그저 이 여행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내 뒤에 걸을 누군가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이 옷이 다치지 않게 받아준다면 그것으로 나의 선행을 대신할까 했지요.”
“재미있는 사람이구만. 돌멩이에겐 줄 수 있다면서 왜 나에게 주는 것은 망설이시오? 같이 가십시다. 같이 걸어가면서 당신이 내게 맞는 이름을 지어 주시구려. 나를 뭐라 부르고 싶나요?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 마음입니다.”
“벌써 당신에게 어린 시절 가장 사랑했던 인형의 이름을 붙여 줄지, 좋아하는 책 속 영웅의 이름을 붙여 줄지 들뜨려하는 내가 한심합니다. 당신마저 나를 떠나면 나는 아마도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데...... 당신에게 이런 속내를 털어놓는 것이 계속 같이 해 달라는 협박으로 들리진 않나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외투를 입은 이가 말했습니다.
“망설이시오. 계속 망설여도 좋습니다. 어차피 당신의 외투가 해어질 때까지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여기서 당신을 기다렸소. 1000일이나 1000일하고도 하루를 더하거나 내겐 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한 벌뿐인 외투를 나눠 입는 사이라는 게 중요할 뿐이지요.”
사람이 깊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가운데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미 떠나온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을.
덧붙이는 말: 이상기온으로 따뜻한 겨울을 보내며 불현듯 오래전 파리에서 불어를 배울 때 들은 피카소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젊은 피카소는 지독히도 가난한 예술가라서 외투 한 벌을 룸메이트 카사헤마스와 나눠 입었다. 낮에 카사헤마스가 외투를 입고 나가면 좁은 방에서 피카소는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일을 마치고 카사헤마스가 돌아오면 피카소는 그가 벗어 준 외투를 입고 밤의 카페로 나가 다른 예술가들과 삶과 그림에 대해 얘기하거나 혹은 술을 마셨다. 두 사람 중 하나는 성공한 화가가 되어 생전에도 높은 값으로 그림을 팔았고 사후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는 유명세를 얻었고,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거절당한 것에 괴로워하다 젊은 나이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리고 그 코트는 카사헤마스의 것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문득 나눠 입는 낡은 외투가 내 안에서 튀어나와 생일에 동화 같은 것을 쓰는 것 보면 나도 참 그다지 창의적이지 못한 사람인 게 분명하다.